내가 체감하는 노화의 증상 중 하나는 잠에 예민해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잠을 단 몇 시간만 자도 개운했다. 왕복 네 시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자정이 넘어서 잠들고, 새벽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도 큰 불편함 없이 지냈다. 하지만 요즘은 잠을 조금만 잘 못 자도 하루가 고통스럽다. 노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결국 그때 쌓인 불규칙한 수면 습관이 몸을 망가뜨린 결과가 아닐까 싶다.
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버거운 일들이 들이닥치면 나는 제일 먼저 수면의 질을 낮춘다. 저번 주와 저 저번 주도 그랬다. 자격증 시험과 중요한 일을 준비하며 수면 시간을 조금씩 늦췄고, 모든 게 끝난 후에는 다른 신경 쓰이는 일들로 인해 만족스러운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기상 직후 몸의 상태는 하루의 기분을 좌우한다. 나는 맑지 않은 머리를 부여잡고 힘든 하루를 보내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는 정말 건강한 수면 패턴을 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제시간에 잠드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처럼 피곤한 날일수록 제때 잠들려면 낮시간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이 불안정한 하루를 어떻게 버텨냈는지 돌아보며 이를 기록하고 공유해보려한다.
먼저, 아침으로는 퀴노아 샐러드를 곁들여 빵을 구워 먹었다. 요즘 한가득 삶아둔 퀴노아를 아침마다 한두 숟가락씩 좋아하는 야채, 과일, 올리브유와 같이 먹는데, 고소하고 든든한 한 끼라 매일같이 즐기는 중이다.
아침 식사 후에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할 일을 했다. 요즘 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세상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다. 전공인 음악뿐만 아니라 경제, 전시회, 영화, 페스티벌 등 다양한 분야의 소식을 뉴스레터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찾아본다. 간단한 메모를 남기며 세상을 훑어보고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최근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한 무더기다.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읽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이야기에 푹 빠져든다.
남은 시간에는 식단을 짰다. 출근 전까지 무엇을 먹을지 냉장고 속 재료를 살펴보며 계획을 세웠다. 바로 점심으로 만들어 먹은 것은 알리오 올리오 볶음밥이다. 유튜버 '유지만'님의 레시피를 참고했는데, 평소에도 간단한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분이라 자주 살펴보는 채널이다. 계란과 레시피에 없던 새우를 추가했더니 영양학적으로도 훌륭하고, 맛도 좋은 최고의 식사가 됐다. 몸은 피곤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점심 식사 후에는 또다시 생각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월급을 어떻게 운용할지 비율을 나누어보고,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티켓팅에 도전했다. 임윤찬은 3월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데,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연주를 볼 기회라 티켓 오픈도 전에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었다. 정시에 들어간 예매 사이트는 이미 대기 인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이를 예상했었기에 홀가분히 창을 닫았다.
'이제 뭐 하지?' 자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면 소화불량과 더불어 밤낮이 바뀌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 같았다. 결국 고민 끝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 현대 도자공예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전시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국의 도자공예가 어떻게 전통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사회의 변화에 적응해 왔는지 그 과정과 결과를 엿볼 수 있어 뜻깊었다. 특히 전시의 구성이 좋았다. 나는 전시를 관람하는 것, 전시물에 관해 공부하는 것 모두 좋아하지만, 한꺼번에 과도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 일찍이 피로를 느끼곤 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내가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깊이가 있었기에 끝까지 집중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김지혜 작가님의 <사랑의 서신>과 <모국어>였다. 작가는 손으로 움켜쥔 지점토를 주된 오브제로 사용했다. 당연히 지점토를 손으로 쥘 때마다 조금씩 다른 형상이 나오는데, 작가는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이나 언어화되지 못한 생각에 비유했다. <모국어>라는 제목은 도예 작업에서 점토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재료이며, 마치 알파벳과 같은 기본 요소라는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모국어)로 내뱉어지기도 하고, 그대로 맴돌다가 잊혀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된 생각은 내가 파악하기도 용이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본체는 생각 뭉치라는 점이 재밌었다. 작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움켜쥔 지점토로 표현해냈다. 즉, 지점토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모국어이다. 주옥같은 작품을 보고 나니 머리에 전구가 켜진 듯 피로가 가셨다. 마치 도파민이 피곤을 삼켜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곧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그동안에도 잠을 많이 못 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을 더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잠깐 눈을 붙이고자 침대맡 스탠드를 켜 놓은 채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이 숙면에 방해를 받은 것 같다. 이번에는 개운하게 잠을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다. 취침 30분 전에 모든 전자기기 사용을 멈추고, 침실로 책을 한 권 들고 들어가 졸릴 때까지 읽었다. 그렇게 잠을 퍽 못 잔 사람의 하루가 끝났다.
이렇게 잠을 자고 나서 다음 날 변화가 있었느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잠을 자고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피곤하다. 며칠, 아니 몇 년 동안 쌓인 피로를 해소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곧 휴일이 끝나고 5시 반 기상 루틴이 시작된다. 두려우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겠다. 잠을 못 잤을 때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하지만, 건강을 우선순위에 두고 내 에너지의 총량에 맞춰 할 일을 잘 분배한다면, 점차 적응하여 건강과 일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푹 자고 웃음꽃이 가득한 하루를 맞이할 수 있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