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한 유대인의 전진이라고 말하기에는 그의 다리가 없으며, 한 유대인의 후퇴라고 말하기에는 그의 족적이 뚜렷하다.
라즐로 토스가 망명으로 인한 도피에서 근원적 회귀까지 맞이하는 동안, 그에게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그의 연대기는 상승세로 끝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에필로그의 해석에 따라 어쩌면 분명한 하락세로 끝을 맞이한 셈일지도 모른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이러한 모호성을 꽤나 용의주도하게 드러내거나 감추는 형식으로 나타낸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정확한 의중을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어느 분기점부터 라즐로 토스(이하 라즐로)를 두 개의 자아로 나누어 바라본다.
바로 건축가로서의 라즐로와 유대인으로서의 라즐로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화면을 채우던 라즐로의 결혼식 사진은 사라져 간다. 2막이 시작되며, 행복할 줄로만 알았던 가족과의 재회도 잠시, 이후에는 불협화음이 유발되기도 한다.
그간 몇몇 여자들에게 약간이나마 관능적인 음모를 한 켠에 품었던 라즐로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자책과 혼란 속에 있다. 그리고 가족들을 만난 시점에서 그의 시선은 여자가 아닌 해리슨의 부탁으로 시작된 필생의 건축 프로젝트를 향해 있다. 관능적 대상이 여자에서 건축물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그간 나치의 탄압으로 눌려 왔던 건축가로서의 야망과 욕구가 새어 나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한, 그 순간부터는 가족과 해리슨네 양쪽 모두와 멀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예산 초과 문제에 다소 억지를 부리는 그의 태도를 해리는 탐탁치 않게 여기고 해리슨과도 이후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없다. 해리가 조피아를, 해리슨이 에르제벳을 추근대는 탓에 그의 프로젝트에도 영향이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라즐로는 가족을 보호하려 들지만, 훗날의 행보를 볼 때, 한편으로는 가족을 프로젝트의 방해물이라 여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남편과 거리적, 심리적으로 멀어진 에르제벳이 쓴 편지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제단을 만드려는 걸지도 몰라'라는 나레이션은 라즐로가 마침내 건축가로서의 자아로 뒤덮여졌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브래디 코베 감독은 영화를 1막과 2막으로 나누듯이(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이에 맞춰 의도적으로 라즐로의 자아를 2막부터 두 개로 분리시켰다.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얻으려면 에필로그를 들여다봐야 한다. 에필로그에서 라즐로는 성공한 건축가가 되었지만, 아내와 조카가 가졌던 질병을 한 몸에 받은 충격적인 비주얼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끝내 자신의 건축물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 조피아가 대신 연설하지만, 그녀의 설명은 이상하다. 라즐로의 건축물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는, 작중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내용을 얘기한다.
여기서는 조피아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 관객이 조피아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시점은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을 때다.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이 되겠다는 그녀는 명백히 시오니즘을 의인화한 인물이다. 그리고 해리슨이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이유가 아메리칸 드림을 포함해 가족계 사회를 좋아하는 아메리카를 풍자하기 위함임을 고려해보면, 조피아 또한 결코 시오니즘을 찬양하기 위한 인물로서 만들어졌을 리 없다.
이러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인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목적지입니다'라는 시오니즘을 대변하는 듯한 대사는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며, 이로서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의 패기로운 건축 신화로 시작하여 시오니즘 영화로 끝나고야 만다. 감독은 자신이 만든 전기영화를 스스로 추락시켰고 결과적으로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풍자가 된 셈이다.
에필로그만 옛날 다큐멘터리마냥 다르게 연출된 것도 효과적인 반전을 노린 탓일 테다.
분명 라즐로가 건축가로서의 자아를 선택하며 굳세게 밀고 나갔다면, 그의 말로 또한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막판에 유대인으로서의 자아까지 챙기려 했고, 그로 인해 아내와 조카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며, 최후에는 건축가로서 운명을 달리한다.
라즐로가 이스라엘이라는 정서적 귀향을 택한 결정적인 이유에도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해리슨은 지적 컴플렉스가 있는 인물이다. 특히 예술 계통의 인물인 라즐로를 향한 선망은 더했다. 그런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좋았을 그이지만, 산통이 깨진 뒤, 은근한 시기가 터져 나왔고 결국 라즐로를 강간한다. 이 장면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울 좋을 뿐인지를 말하며, 둘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면, 영화의 핵심 주제에 가장 근접하는 장면일 정도다.
라즐로는 단순히 아메리카에게 상처를 받아서 이스라엘로 떠난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금기인 동성애적 행위를 함으로서 본인의 정체성에 혼란이 온 탓에 죄를 뉘우치고자 하는 마음 또한 존재했을 테다. 게다가 라즐로가 동성애에 관해 고민했음을 암시한 장면 또한 존재한다. 초반부, 매춘부와의 성행위에도 흥분하지 않던 라즐로의 시선은 친구를 향해 있었다. 애써 자신은 그런 취향이 아니라며 도망치듯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은 더욱 확실한 증거다.
이는 다시 말해 애초부터 감독은 라즐로에게 선택에 대한 변명조차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부여된 운명적 결말은 신화와 참 어울린다.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양식은 건축학적으로 시대적 맥락이 잘 녹여져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한다. '브루탈리스트'는 당시 나치를 피해 이리저리 옮겨 사는 유대인과 거친 성장세로 격변을 겪던 미국의 모습을 충실히 녹여내고자 했다. 브루탈리즘 건물 외면이 요새 같듯이, 라즐로는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을 건물을 쌓으려 했고, 뒤짚인 자유의 여신상처럼 아메리칸 드림은 적나라한 비판에 넘실거렸다. 아마도 결말의 해석이 갈릴 것까지 계산된 모호성으로 영화는 여전히 맥락이 진행 중인 시오니즘에 관해서는 (그 의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커브를 던졌고, 당시의 미국에 관해서는 한없이 직구였다.
이처럼 이중성을 띄는 '브루탈리스트'는 영화 속 캐릭터들과 많이 닮았지만, 그런 면에서 획일적이기도 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