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잠들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꿈 대신 남의 이야기 속에 발을 담갔다. 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았다. 활자와 이미지 사이를 정신없이 유영하다 보면, 억지로 잠을 청하는 동안에 날카로워졌던 시간 감각이 점차 무뎌졌다. 그러다 문득 이야기에 흠뻑 젖은 고개를 쳐들고 바깥을 내다보면 하늘은 짙은 보랏빛이 아닌 창백한 푸르름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얼굴이 파랗게 물들어가는 동안 바깥에서 들려왔던 소리들을 기억한다. 쓰레기차의 소음, 빗자루를 쓰는 소리, 누군가의 서두르는 발걸음. 희미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모두가 아직 잠들어 있는 새벽녘에도 이야기는 피어났다. 그 모습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대학에 와 동기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에서, 야간 출동을 마치고 귀소하던 구급차에서, 짝꿍과 함께 떠났던 속초 앞바다에서.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밤은 어두운 베일로 모든 걸 감싸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감춰진 것들이 안심하고 고개를 들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밤은 은밀하고, 동시에 솔직하다. 양가적인 수식어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명사가 또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밤의 속성은 2019년 10월 12일을 보내던 야닉 에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20세기에 활동했던 영국 출신의 화가다.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원초적이고 강렬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폭력과 잔인함의 화가'라는 이명처럼 그의 그림은 고통스럽고 끔찍했지만, 한편으론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고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저자인 야닉 에넬도 그 울림에 응답한 사람 중 하나였다. 청소년기부터 베이컨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야닉 에넬은 우연한 기회로 2019년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프랜시스 베이컨 특별전"에 전시된 베이컨의 그림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도서 <블루 베이컨>은 특별했던 그날 밤의 기록이다.
그날 밤, 야닉 에넬은 머리를 얼얼하게 만드는 편두통을 억누르며 불안한 상태로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겪는 편두통의 원인을 깨달았다. 통증은 베이컨의 그림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베이컨의 그림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의 붓은 일종의 메스(의료용 칼)다. 우리가 내면에 꽁꽁 감추었던 것들을 반으로 갈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베이컨의 작품과 밤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은밀한 것들이 솔직해지는 시간. 어쩌면 야닉 에넬이 퐁피두 센터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선택했던 것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작품을 온전하게 마주하기 위한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서 <블루 베이컨>은 일반적인 미술책과 달리 베이컨의 작품 세계를 해설하기보다는 저자 개인의 감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라서 책에서 언급되었던 대부분의 작품은 처음 들어본 것들이었다.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동명이인의 철학자가 내겐 더 익숙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컴퓨터 모니터에 책에서 언급하는 그림을 띄워두었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자화상 - 1971년] 등등. 그리고 이렇게 그림을 앞에 두고 있으니 나도 야닉 에넬이 보냈던 그날 밤의 여정에 동참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5개에 달하는 챕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에 대한 것이었다. 베이컨은 신화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을 추상화로 표현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 속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에게 자신의 다친 발을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야닉 에넬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목소리는 하나이고, 발은 때로는 두 개, 때로는 세 개, 때로는 네 개이며 발의 숫자가 많을수록 약해지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스핑크스의 물음에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대답이 오이디푸스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을 인정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바꿔 말하자면 스핑크스는 인간을 조롱하기 위해 이러한 수수께끼를 냈다는 뜻이 된다). 그림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다친 발을 스핑크스에게 내밀고 있는 건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이는 베이컨의 예술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앞서 말했듯 베이컨의 그림은 불편하다. 그는 예술이 가져다줄 수 있는 장식적인 위안을 거부하고, 극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해 상처 입는 육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베이컨에게 고통은 인간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허나 그는 고통을 고통으로 두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경험으로 만든다. 그 경험을 전시하여 사람들과 공유한다. 다시 말해 베이컨은 폭력과 잔인함 너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하는 삶의 내밀한 동력을 포착하는 예술가였던 셈이다.
베이컨의 연인 중 한 명이었던 ‘조지 다이어’에 대한 챕터도 인상적이었다. 1963년에 좀도둑과 집주인으로 만난 베이컨과 다이어는 비록 첫 만남은 최악이었으나 서로에게 금방 빠져들었다. 8년 동안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고, 다이어는 베이컨의 뮤즈로서 수많은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허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다. 베이컨은 전시회 준비와 여러 약속으로 너무나 바빴고, 그 사이 다이어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결국 1971년 파리 전시회를 앞두고 두 사람은 크게 다퉜고, 베이컨은 숙소를 떠나 전시회 스태프와 함께 방을 썼다. 다음날 아침, 홀로 있던 다이어는 변기에서 몸을 웅크린 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파리 전시회 이틀 전의 일이었다. 베이컨에게 있어 가장 영광스러워야 할 날이 생애 최악의 날이 된 것이다.
이후 베이컨의 작품들은 더욱 어둡고 기괴해졌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의 내면은 황폐해지고 있었다. 마치 토해내는 심정으로 베이컨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때 탄생한 작품 중 하나가 [1973년 5~6월의 3부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다이어가 죽어가던 모습을 세 편의 그림으로 재구성했다. 그림 속에서 어두운 배경과 다이어의 창백한 얼굴은 대비를 이루며 묘한 공포심을 자극했다. 화장실 외벽은 진홍색으로 덧칠했는데 이는 피를 연상시켰다.
베이컨은 다른 어떤 설명도 없이 자신의 연인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혹자는 이 그림을 보며 그가 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것이야말로 베이컨이 슬픔을, 비극을 극복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떠한 수사도, 위안도 없이 그 기억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재현하며(심지어 그때 받았던 자신의 충격까지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도록 재현하며) 떠나간 연인을 추모했다.
예술가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베이컨은 우리가 고통 너머에서 작동하는 삶의 내밀한 동력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림을 통해 그 사이를 이었다. 야닉 에넬의 글은 그런 베이컨의 그림과 독자들 사이를 이었다. 예술적 광기가 넘치던 화가의 작품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작가의 다정한 문체는 우리로 하여금 낯선 이국의 화가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도록,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등을 떠민다.
밤이 펼친 장막 아래, 미술과 문학 사이의 매혹적인 틈새 사이에서 베이컨의 그림은 야닉 에넬의 이야기를 탄생시켰고, 야닉 에넬의 이야기는 독자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피운다. 예술가가 열어준 문 너머, 당신만이 마주할 수 있는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