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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겨울이면 어김없이 영화 <파수꾼>이 떠오른다. 작중 소년들의 입밖으로 흩어지던 담배연기만큼이나 입김 나오는 날, 꼭 보게 되는 오묘하고 텁텁한 끝 맛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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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2010), 연출: 윤성현, 출연: 이제훈, 박정민, 서준영 외

 

 

‘파수꾼’이 명작으로 평가받는 것은, 소년기의 인물들이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는 관계와 그 속에서 겪는 감정의 변화를 어깨너머에서 여과없이 포착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영화는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낸 관계의 파국, 그리고 그 이후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기태(이제훈), 희준(박정민), 동윤(서준영)은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한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결핍에서 비롯된 기태의 폭력적이고 거친 성향과 예민한 희준의 회피적 인내는 점차 크게 마찰을 일으키며 이들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던 동윤마저 영화의 후반부, 문제의 중심에 서며 괴로워하게 된다. 결국 그들 사이에 쌓이고 쌓이던 감정들은 이내 폭발해 서로의 약점과 폐부를 날카롭게 찔러 댔고, 이는 한 소년의 죽음과 관계의 파국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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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하려면 적어도 세 사람, 타자, 포수, 투수가 있어야 한다. 세 소년은 그들만의 놀이터, 철길에서 지칠 때까지 야구를 하곤 했다. 하지만 희준이 떠나 동윤과 기태, 두 사람 뿐일 때 이들은 그저 공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기태, 한 사람만 남았을 때 그는 야구를 할 수도, 공을 던지고 놀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낡은 야구공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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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영화의 막바지, 공허하게 텅 비어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기태의 눈빛에서 감상자는 절망 섞인 의문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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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지만, 우정, 사랑 등의 관계에서 항상 미숙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은 차곡차곡 쌓인 부재가 아닌지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묻는다. ‘부재의 축적’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파수꾼’ 속 인물들 모두 점차 금 가는 관계의 본질적 소통의 문제를 외면하다 마지막 에서야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고 그 관계에서 도망치거나, 상대의 마음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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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의 우정으로 쌓은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끝낸 소년을 마음에 묻은 두 소년들은 소통의 부재로 조각난 우정과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들은 그저 회피하거나 도망치기도, 괴로워하기도 하며 방황하지만 마침내 감정적 성숙과 이해의 단계에 다다르게 되고, 서로가 달랐음을,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진정 알아주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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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은 연출 면에서도 ‘청춘, 관계’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의 앵글은 소년들의 불안정함을 극대화하고, 걸어가는 소년들의 등을 따라 찍는 팔로우 숏은 이들의 쓸쓸함, 외로움의 감정을 담아냈다. 또한 영화에는 과도한 효과음과 음악이 없다. 오히려 주요 장면에는 그저 인물들의 숨소리, 대화소리, 공간 소음으로만 사운드를 채워 순간의 감정을 오롯이 전달한다.

 

이러한 연출방식, 사운드는 관객을 완전히 영화 속의 세상, 소년들의 세상에 몰입하게 만든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비언어적 표현, 눈빛, 숨소리로만 모든 빈틈을 차단하고 오롯이 그 순간만을 숨죽여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영화가 소년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무섭도록 고요하고 공허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공허야 말로 가장 감정적, 감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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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거장, 이창동 감독은 ‘청춘’이라는 단어를 싫어했다고 한다. 청춘들은 그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태, 동윤, 희준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청춘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삶을 둘러싼 상처, 불안함과 공허함,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시간, 관계의 파국,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시리고 뜨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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