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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영화를 보며 떠올렸던 것은 ‘이야기의 힘’이라는 키워드였다. 좋아하는 이야기에 몰입하며 힘을 얻는 것, 나와 닮은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을 얻는 것, 그 이야기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마침내는 자신이 원하던 결말을 만들어가는 것.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진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보잘 것 없는 이야기, 아무것도 아닌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누군가에겐 그것이 무척 중요한 것이 된다. 그 끝이 나와는 다르기를 인물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하여 그 허구의 이야기로 인해 현실의 내가 치유받는 그런 과정들까지 말이다.


그런 면에서 <더 폴>을 바라보면 추락과 비상이라는 점에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인생과 닮은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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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도 알렉산드리아도 높은 곳에서 추락한 인물들이다. 특히 로이는 추락 사고로 인해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스턴트맨이라는 직업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앞날 또한 꿈꿀 수 없게 되었다. 추락은 로이에게 삶에 대한 비관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로이가 말했듯, 추락한 인물은 다시 올라갈 수 없는가? 완벽하지 못하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면 죽는 것이 더 나은 결말이 될 것인가?

 

아마도 로이의 답은 ‘그렇다’였겠으나 알렉산드리아에게는 그렇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결말을 향해 가며 로이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에게 비극적인 죽음을 선사한다. 이야기 속 악당인 오디어스와 대면하게 된 검은 무법자마저 죽음의 문턱을 밟게 되자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에게 말한다. 검은 무법자를 살려내 달라고, 오디어스를 해치우기 보단 무서웠을 그의 딸을 안아달라고.

 

악당을 물리치기 보단 무서워하고 있는 딸을 안아달라는 것.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불을 지르던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알렉산드리아가 하고 싶었을 말이었을 것이다.


로이의 이야기는 그렇게 로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지루한 병원 생활 속 유일한 즐거움을 넘어 일종의 치유로 변모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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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로이에게도 이 이야기는 치유가 되었을까?


알렉산드리아가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고 병원 사람들과 함께 로이가 참여한 영화를 보면서도, 알렉산드리아가 퇴원해 과수원에서 로이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 한켠에 둥둥 떠올라 있던 것은 로이의 결말에 대한 질문이었다. 로이는 이 영화가 끝난 후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로이가 가진 상처가 치유되기 아주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고, ‘현실적으로’ 로이가 나을 가능성은 적어보이며, 우울과 자살충동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나을 수 없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이가 살아서 삶을 영위하는 것보단 원하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더 쉽게 그려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로이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그 답을 이미 영화에서 보았다.

 

<더 폴>에서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를 이어주던 이야기를 로이가 절망 속에서 비극적으로 끝내려 했을 때 알렉산드리아는 직접 그 결말을 바꿨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가 가지고 있던 상처가 조금은 치유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마찬가지로, 로이가 살아가기를 선택했을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했을지 영화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관객이 바라는 대로 이야기가 변할 것임을. 내 안에서 로이는 굳건히 살아남아 ‘영화처럼’ 혹은 ‘기적처럼’ 재활에 성공하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그 반대로 로이가 결국 죽음을 택했다고 믿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로이는 관객이 믿는 대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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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는 자신의 삶이 추락에서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안다. 살아가다 보면 높은 곳에 올라가기도 혹은 그곳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삶이 아무리 한없이 잔인해진다고 해도, 떨어지고 굴러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외칠 때에도 삶은 흘러간다. 그러한 인생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을 받아들일 용기이며 그 이후에야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치의는 알렉산드리아의 어머니에게 알렉산드리아는 분명 다시 떨어질테니 과수원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한다. 과연 알렉산드리아가 영어에 서툰 엄마에게 그 말을 제대로 전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알렉산드리아는 그 말을 들었다는 점이다. 다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엔딩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보란 듯이 과수원을 누비며 오렌지를 든 채 로이에게 말한다. 흑백영화 속에서 당신을 보았다고, 그들은 떨어지고 다치고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고. 다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올라가는 것. 그리하여 추락과 비상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 아닐까. 추락과 비상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 <더 폴>은 언제든 꺼내 볼 이정표 같은 이야기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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