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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이 결심을 필요로 한다면 얼마나 혼잡스러울까. 우리는 모든 행동에 뚜렷한 이유가 있길 바라지만, 대부분의 행동은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두 어절을 처음 마주했을 때 의미가 와닿지 않아 한참을 곱씹었다. 헤어지는 데에 무슨 결심까지 필요한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어졌다면 이미 끝인 거지.


하지만 어떤 일에는 반드시 결심이 필요한 법이다.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서래에겐 해준과 헤어지는 일이 그랬다. 보통 일에는 결심을 도통 하지 않던 사람이 결심을 했다는 것은,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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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꼿꼿한 사람이다. 그는 몸에 ‘KDS’라는 낙인이 새겨져도, 구타를 당해도 이 악물고 견딘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망설이지 않고 실행한다. 해준과 처음 만났을 때도 서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도수를 살인한 증거를 없애야 하는데, 마침 경찰인 해준이 호감을 표시해온다. 서래는 어쩐지 재밌다고도 생각한다. 몇 안 되는 품격 있는 사람이었으니. 배려한답시고 쉬운 한국말을 쓰고, 치마를 끌어올려 흉터를 드러내자 여자 형사를 불러오겠다며 벌떡 일어나고, 뻔히 보이는 곳에서 망원경으로 서래를 관찰하는 품위 있는 경찰. 서래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까마귀 시체 대신 친절한 경찰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서래는 건조하고 무료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해준이 자신을 떠올리며 살아있기를 바랐다. 방법은 간단했다. 저 멀리서 선을 지키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넘어버리는 것. 해준이 출동한 현장에 찾아가 해준의 또렷한 눈망울을 마주하면서, 서래는 처음으로 선을 넘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새벽에 자기 집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용의자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해준의 집에 찾아간다. 해준이 도망치듯 떠난 이포로 찾아간다. 해준의 모든 것이 됐다가 영영 사라져버림으로써 마지막 선을 넘는다. 해준은 경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서래에게 푹 잠겨버린다. 그리고 완전히 붕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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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가역성을 지닌다. 사랑은 사람을 이리저리 흔들어놓고 마구잡이로 망가뜨리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나는 너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 버렸어”라는 말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사과다. 서래는 사과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그 전으로 되돌려야겠다고 결심한다. 품격 있던 경찰, 서래처럼 꼿꼿하던 예전의 해준, 그때로. 서래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 앞으로의 미래, 해준의 방어기제 따위가 아니다. 서래는 해준의 안위만을 신경 쓴다. 두 번째 남편이 녹음파일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할 때 서래는 곧장 사철성의 어머니를 찾아가 죽인다. 해준은 뭐가 그렇게 급했냐고 묻지만 화면 밖의 우리는 알고 있다. 급했던 것이 아니다. 망설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서래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때도 망설이지 않았나. 벽을 온통 채운 미결 사건 사진을 봤을 때, 깔끔하던 해준이 자신으로 인해 붕괴했을 때, 깊은 바다에 멀리 던져버리라는 말을 사랑으로 치환해 가만히 들었을 때, 그의 미결 사건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바다에 자신을 영영 빠트려버려야겠다고 결심했을까. 신기한 일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시작한 일이 결국 헤어지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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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해준에게 묻는다.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문득 살아있는 것 같았죠?" 해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사실이었으니까. 서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왜 죽음을 선택했나? 해준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서래는 해준이 어떻게 해야 편하게 잠드는지 안다. 어느 재킷 주머니에 립밤이 들어있는지 안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며 휴대폰을 돌려줘도 재수사하지 않을 것을 안다. 이러려고 이포에 왔냐고 따져 물을 것을 안다. 서래는 단순히 아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해준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피 냄새를 싫어할 해준을 위해 수영장 물을 빼내고 피를 박박 닦아댄다. 하지만 정작 서래는 해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서래의 죽음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고백이다. 왜냐고? 해준은 서래를 잡아 넣을 유일한 증거인 휴대폰을 깊은 바다에 영영 찾지 못하게 던져버리라는 식으로 고백을 건넸다. 서래는 해준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깊은 바다에 자신을 빠뜨려버리는 것이야말로 사랑이겠구나'라고 생각한다. 해준보다도 해준을 잘 알고 누구보다도 해준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옆에 있을 때 결국 시들어버리고 붕괴할 해준을 알았다.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선택인 셈이다. 해준을 위해 죽었지만, 결국 이 선택은 해준이 서래에게 풍덩 잠기게 만들었다.

 

광활한 바다 주변을 걸어 다니는 서래를 보며 관객들은 서래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리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서래는 자신이 들어갈 구멍을 직접 판다. 까마귀 시체를 묻기 위해 땅을 팠듯이. 거센 파도는 서래가 몸을 담은 구멍을 완전히 메운다. 해준은 바로 그 위에서 서래를 찾는다. 왜 서래는 바다에 걸어들어가는 방식으로 죽지 않았나. 조각 같은 단서를 토대로 추측해 보자면, 서래는 해준이 언젠가 밟을 땅 밑에 있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자신을 찾는 해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미소 지었을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미결 사건의 완벽한 엔딩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바다에 걸어가면 언젠가 시체가 발견되지만, 땅에 파묻히는 순간 아무도 찾지 못할 테니.

 

서래는 언제나 관객과 해준의 예상보다 두 발짝 앞서있다. 사람들을 깊이 사고하게 만드는 것은 선구자의 운명이다. 관객은 천천히 그리고 급하게 서래의 행동을 추적해나간다.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했지? 왜 저런 행동을 하지? 몇몇 선구자는 끝내 이해받지 못하고 몰락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사정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알게 됐을 때, 그 사람을 둘러싼 신비한 장막이 결국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알게 됐을 때, 나를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나를 위해 모든 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 해준의 사랑은 서래의 죽음으로 성숙한다. 하지만 완결되진 못한다. 대상이 영영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해준은 서래가 해준을 아는 만큼 서래를 알지 못한다. 서래는 해준을 너무도 잘 알기에 사랑하지만 해준은 서래를 너무도 모르기에 사랑한다. 이 정보의 불균형 사이에서도 둘은 자기만의 언어로 고백을 건넸다. 그리고 마침내 헤어졌다.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이뤄냈다. 반면 해준은 서래와 영영 결별하지 못한다. 그는 헤어질 결심조차 하지 않았기에.

 

세상에 나와 영화만 존재하는 것처럼 집중한 경험이 벌써 2번, 잠 오지 않는 새벽에 영화 생각에 흠뻑 젖어 이런 글을 써놓고서도 여전히 묻고 싶다. 서래에게 해준은 어떤 의미였냐고. 내 머릿속의 서래는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미결 사건이 되고 싶게 만든 사람.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담배 연기를 참아주고, 엉망인 중국음식을 만들어주고, 품위를 버려가며 최종적으로 붕괴한 사람. 여기까지 쓰고서야 깨닫는다. 붕괴한 건 해준만이 아니다. 서래도 완전히 붕괴했다. 결국 헤어질 결심은 해준과 서래가 차례로, 어쩌면 동시에 붕괴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본질이 결국은 붕괴임을 깨닫는다. 붕괴를 함께 견디는 이야기를 한 번 상상해 본다. 붕괴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일이기에. 사랑이라는 변명 아래 서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럼에도 헤어질 결심이 가슴에 콕 박혀 빠져나오지 않는 이유는, 서로가 파괴하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 각자 붕괴하며 사랑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해준과 서래다운 방식인가. 서로의 붕괴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것, 붕괴가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잡던 손을 놓는 것, 마침내. 가슴 속에 가득 찬 파도 같은 울음을 이 글로나마 내보내본다. 파괴도 붕괴도 절망도 없는 영화를 과연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새로웠고, 즐거웠다. 앞으로는 절대 붕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마침내 붕괴하고야 마는 우리들을 부러워하고 안쓰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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