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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공식포스터] 퓰리처상 사진전.jpg

 

 

 

납작한 이미지


 

퓰리처상 사진전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오는 3월 30일까지 진행된다. 전시된 사진들은 시간 순서대로 냉전 시기부터 코로나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동시대까지 다양한 역사적 현장을 그려낸다. 또한, 사진 옆에는 구체적인 해설이 제공되어 있다. 특히,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설뿐 아니라 그것을 촬영한 기자들에 대한 소개까지 덧붙여 있다는 점에서 언론인에 대한 존중과 예우가 느껴졌다. 기자 중 많은 이들이 전쟁이나 테러 현장을 취재하다가 순직했다는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현장을 지키는 언론인의 크나큰 책임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해설은 또 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사진을 본 직후의 감상과 해설을 통해 알게 된 현장을 비교하는 재미이다. 그런데 종종, 그 두 가지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베트남전에서 촬영된 한 사진은 남베트남 군인이 민간인처럼 보이는 포로를 총으로 즉결 사살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은 '사이공식 처형'이라고 불리며, 민간인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으로 한때 미국 내 반전 여론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사살된 이는 사실 민간인이 아닌 베트콩 장교였고, 그는 남베트남 군인의 일가족을 무참히 살인하고 강간까지 저지른 전쟁 범죄자였다. 그가 '죽일 만한' 사람이었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사진이 포착하는 이미지에 대한 납작한 해석이다. 카메라 렌즈는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할지 선택한다. 때문에 사진을 보는 스스로에게는 언제나 이면을 보는 눈을 갖추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크기변환]잭 루비 오스왈드를 사살하다- Alamy Stock Photo.jpg

Alamy Stock Photo


 

 

부채 의식의 화살


 

우리는 이미지가 과도하다고 느껴질 만큼 범람하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다. 특히, 재난이나 참사 앞에서 이미지의 파급효과는 강력하다. 이태원 참사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의 경우, 사고 현장이 사진과 영상에 그대로 담긴 채 SNS를 떠돌았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진상을 알리고 조명을 끌어모으는 순기능을 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역기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모자이크 하나 없이 지나칠 만큼 적나라한 이미지는 보는 이들에게 충격, 공포,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누군가의 구체적인 재난을 이미지로서 간단히 ‘소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이미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끼게끔 한다. 이미지에 담긴 현장은 너무나 참혹한 데 반해 그것을 접하는 데 드는 노력이 그저 클릭 한 번이라는 괴리감은 죄책감을 더욱 극대화한다.

 


[크기변환]13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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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종종 화살은 자기 자신을 향하는 죄책감이 아닌 타인을 향한 비난으로 궤적을 바꾸기도 한다. 아이가 독수리 앞에서 웅크린 채 엎드려 있는 유명한 사진. 이 사진을 찍은 기자 피터 카터는 쇄도하는 비난으로 인해 자살했다. ‘왜 아이를 먼저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야 했는가’ 라는 비판은 일견 정당한 분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든다면, 이는 어쩌면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데서 오는 부채 의식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지우는 덜 아픈 자구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고통에 대한 방관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또 다른 고통에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서 저자 김인정은 이러한 부채 의식에 담긴 큰 힘이 올바른 공적 방향으로 선회하는 방식에 대해 말한다. 그는 사진을 통한 대상화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대상화를 무작정 멈추라는 말이 자칫 '타인에 대한 말하기' 자체를 멈출 수 있음을 우려한다. 그러면서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지겨우리만치 흔한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숨 가쁜 추모와 기간을 정한 애도를 하며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자못 엄숙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본 뒤 슬픔에만 머무르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하다. 구경하는 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본 뒤에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선언은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33p
 

 

 

나가며


 

사진을 왜 찍는가?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사진을 왜 보는가? 이다. 퓰리처상 전시회에서, 범람하는 이미지의 세상에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토록 많은 사진이 그보다 더 많은 비극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에, 이 같은 현장이 카메라 렌즈의 주목 없이도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압도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이미지를 바라보는 데서 일종의 부채 의식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서 이야기하듯이, 이미지를 본 우리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적 대화를 시작하기를 선택할 힘이 있다. 어쩌면 퓰리처상의 의의 자체가 단순히 인상적이거나 잘 찍은 사진을 기리기보다, 그것을 통해 사회적 의제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퓰리처상 사진전 전시의 기획자인 시마 루빈은 이렇게 말했다. "퓰리처상 사진전은 단순히 과거를 보여 주는 전시가 아니다. 퓰리처상 수상작들은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이를 이해할 지혜가 있다면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사진가들이 위험한 현장을 지키는 이유다." 데자뷔처럼 반복되는 역사적인 비극 앞에서, 그것을 단순히 픽션 내지는 '극'으로 치부하기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사진은 우리를 현장과 부쩍 가까워지게 만드는 힘이 있고, 그 이후의 일은 이제부터 우리의 몫일 것이다.


 


김채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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