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설 연휴 동안 유튜브를 떠돌았다. 별생각 없이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영상을 보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아무런 목표 없이 그냥 클릭하고, 몇 가지 영상들을 넘겨보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다큐멘터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다큐들을 찾은 것도 결국 휴대폰을 통해서라는 점이 모순적이고, 또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다. 문명의 풍요를 내려놓고 히말라야의 작은 마을 라다크로 떠난 미국인 부부와, 세상과 단절된 봉쇄수도원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삶은 왜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면서도 그 안에서의 치열한 행복이 서려있고, 그들이 바꾸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라다크의 부부, 자연과 행복
평범한 미국인이었던 커플은 미국을 떠나야겠다는 여인의 말에 그 길에 동참해도 되겠냐는 남자의 제안으로 성사된 삶을 살고 있다. 미국에서 저 멀리 히말라야 작은 왕국 라다크로 이주한 것이다.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 생활하고, 양떼도 몰며 자연의 삶을 실천 중이다.
라다크에서 살아가는 부부가 이야기한 '초콜릿'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국에서 공수한 초콜릿을 핫초코로 만들어 마시며 행복해한다. "이게 전부라서 더 소중하고, 그래서 더 음미할 수 있어 행복해." 여자는 미국에서라면 원하는 건 뭐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풍요로운 소비 속에서 살아갔다고 말한다. 너무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라다크에서는 몇 조각의 초콜릿이 전부이고, 그 때문에 그 순간이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며 초콜릿을 음미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문득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지 생각했다.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 선택의 자유가 너무 많아, 결국 어떤 것이 중요한지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흠칫하고 느껴보게 되었다.
그들의 삶은 물질적 풍요를 뛰어넘는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듯했다. 그들이 초콜릿 한 조각에서 느끼는 감동이 나에게도 크게 와 닿았다. 물질적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가진 것이 주는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손에 쥐려는 욕망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 소박한 초콜릿 조각, 나뭇가지 조각들이 그 모든 물질적 풍요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부족함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듯 보였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부족함 또한 어쩌면 내가 정의내린 그들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으니, 난 아직도 물질적인 것에 욕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봉쇄수도원, 고독과 침묵 속에서
또 다른 다큐는 한국 경북 상주 산곡산 자락에 위치한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수도사들이 고독과 침묵 속에서 평생을 보낸다. 1084년, 성 부르노가 프랑스 샤르트뤄즈 계곡에 세운 카르투시오 수도회에서 시작된 전통이, 이제 한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신과의 일치를 추구하며 엄격한 규율을 따르고 있다.
하루 한 끼의 식사, 재봉틀로 기워 입은 옷, 그리고 오직 기도와 노동만으로 채워지는 삶이다. 이 다큐는 그들의 고독하고 엄격한 수행을 추적하면서, 세속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보여준다.
이 수도사들의 삶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수도사들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들의 삶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을 넘어서, 신과의 일치를 위한 깊은 구도의 여정이었다. 무교인으로서의 궁금증과, 그들의 머릿 속에는 어떤 세상이 존재하고 있을지에 대한 어쩌면 경외심이라고 표현될 만한 감정들이 솓구쳤다. 분명 더 넓은 인간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은 나일텐데, 머릿 속 세상은 나보다 그들이 훨씬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고요함'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나는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고독과 결핍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의 의미
이 수도사들이 선택한 고독과 결핍 속에서, 나는 ‘자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부족함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로 가는 길이었다. 다큐는 그들의 물건 중에 구멍이 날 대로 난 양말, 옷 그리고 심지어 고무 장갑도 찢어진 채로 계속 사용하는 모습들을 고요하게 집중적으로 담는다. 그들은 그런 물질적 결핍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자유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수도자의 A4용지에검은 볼펜으로 그은 십자가를 방 한 켠에 붙여놓고 그를 향해 기도하는 것을 보고, 무교임에도 불구하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화장품 하나하나에 혹하면서 구매를 하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볼펜 하나도 여러 개 사두고 싶어 하는데, 수도자들의 삶에서는 그런 허투루 보내버리는 자원, 혹은 에너지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물질을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가 얽히고, 결국 자유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사들은 고통과 결핍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 한다.
그들이 그 안에서 자신을 비우는 과정은, 나에게도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그들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선택을 보며 내 삶에서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실, 고요하고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작은 변화, 나에게도 필요한 고요함
이 다큐들을 보면서, 나는 내 삶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디지털 세계에서 길을 잃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짧은 자극과 흥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사들은 그 고요함 속에서 신과의 일치를 추구하는데, 나는 매일 내 손안의 스마트폰 속에서 알림에 반응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들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처럼 덜어내는 연습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조금 더 가볍게, 그리고 더 의식적으로 살아보려 한다.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고요한 시간을 보내며 내 삶을 돌아보는 것. 순간적인 자극보다는 좀 더 깊이 있는 만족을 찾는 것. 그런 작은 변화들이 나에게도 다른 감각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라다크까지는 못 가더라도, 내 방식대로 조금 덜어내고 가볍게 살아보려 한다. 올 한 해는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