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달빛 아래 춤으로 깨어난 수원화성의 숨결, (2024) [공연]
-
"문루, 깨어나다"는 수원화성의 사대문(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을 주제로 한 창작 무용 공연으로, 각 문루가 깨어나 춤을 춘다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수원화성의 역사와 가치를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작품이다. 2016년 초연 이후 매년 발전을 거듭하며, 다양한 무용단과 장르의 결합을 통해 더욱 다채로운 색감을 선사한다. 각 문루는 고유한 상징성과 이야기를 지니며, 이를 춤으로 풀어내어 현대적 감각과 전통미를 조화롭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지난 11월 30일, 수원화성 바로 건너편에 있는 정조테마공연장에서는 사대문이 춤으로 깨어났다. 밤이 깊어질수록 무대는 고요해지고, 천천히 떠오르는 만월은 온 공간을 환히 비춘다. 달빛은 부드럽게 퍼지며 무대 뒤편에 커다란 화면 위로 떠오르고, 관객석은 숨죽인 채 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이윽고 무대 위에는 달을 품은 여인이 발을 내디딘다. 무용수의 섬세한 움직임은 은은한 달빛과 어우러져 마치 달 속에서 깨어나는 생명이자 밝은 빛처럼 신비롭고 우아하다. 여인의 춤은 한 줄기 바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이 무대의 시작이자 사대문의 이야기를 열어젖힌다.
나는 이번 <문루, 깨어나다>의 사대문 중 화서문을 상징하는 무용수로 참여했다. 본 작품은 수원화성의 대표적인 사대문(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을 주제로 한 창작 무용 공연으로, 각 문루가 깨어나 춤을 춘다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수원화성의 역사와 가치를 재현하는 작품이다. 각 사대문은 한 명의 살아있는 정령처럼 각자의 매력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맡은 화서문은 긴 한삼 자락으로 그 존재감을 표현한다. 춤을 추면서도 한삼의 움직임까지 일체화되어 화서문의 강하지만 세심한 움직임, 그리고 긴 역사를 담고자 노력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서문의 정령을 상징하는 무용수가 긴 한삼 자락을 휘두르면 수원화성에서 가장 길고 높은 모습을 상징하는 화서문이 전하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 이는 본 공연에 참여하면서 내가 단순히 개인적인 춤을 추는 무대가 아니라, 화서문 그 자체가 되는 듯한 경험이었다.
무대를 준비하면서, 화서문의 이야기를 춤으로 담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왔지만 본 공연은 단지 화서문만의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세 문들의 이야기와 함께 최종 리허설을 준비하며, 예상하지 못한 다채로운 각 문의 매력과 특징이 잘 드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장안문은 단단하고 건장한 아버지의 모습을 상징한다. 장안문을 상징한 조보경무용단은 깊게 울리는 정중동 음악을 사용하여 굵직한 호흡을 하면서 넓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움직임을 선보였다. 남성 무용수가 솔로를 할 때는 마치 한량의 움직임처럼 즉흥적인 멋을 지니며 전통춤의 깊은 뿌리를 엿볼 수 있었다. 강렬한 광선검으로 무대를 밝히기도 하고, 호흡만으로도 웅장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달무리를 이어 처음으로 선보인 사대문 중 하나의 문으로서 관객들에게 안정감을 부여하였다.
다음으로 등장한 팔달문은 연화무용단이 맡았는데, 따듯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품과 같았다. 앞선 장안문이 강인하고 묵직한 아버지의 춤이었다면 이와 대비되게 백색 의상을 갖춰입고 양손에 붉은 꽃을 든 무용수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꽃은 마치 품 안에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여인의 모습 같았으며 섬세하면서도 정적인 춤을 선보였다. 팔달문은 전면에 반월형으로 성문 밖에 부설하는 옹성을 축조하였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무용수가 치마를 입고 곡선의 움직임을 그리며 추는 것과 닮아있었다. 또한 앞서 진지했던 장안문의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팔달문이 그간 품어온 소중한 기억들과 보물들을 무대 위에 꺼내놓는 시간이었다.
이후 꽃잎이 휘날리듯 팔달문을 상징하는 무용수들이 퇴장하면, 무대 위에서는 팔달문이 부서지는 영상이 상영된다. 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및 손실되었다. 그 당시의 훼손된 모습을 영상으로 보니 너무나 참담하고, 지금의 모습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상이 나오는 동안 무대 위에는 뒤주가 등장하는데, 이는 특히 정조와 사도세자 간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뒤주는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정조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자 수원화성을 건축하고 효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 노력한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러한 역사를 토대로 창룡문을 상징한 조보경무용단의 무용수들은 역동적이고 정적인 움직임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창룡문이 가진 아우라와 그 속에서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표현했다. 중간에 천을 사용해 4명의 무용수가 뒤주를 덮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마치 당시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역사 속의 고통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 수원화성이 건축된 희망과 재생의 상징임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또한 이는 그간의 상처를 승화시킴으로써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넘어 효와 나라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고자 했던 정신을 상징한다. 여러 고난과 시련을 겪어온 수원화성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정조의 유산임을 강조하는 연출이 인상깊었다.
이후 창룡문은 화서문에게 무대의 에너지를 이어주고, 화서문이 피날레를 장식하는 춤을 선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번 작품에서 화서문을 상징하는 무용수를 맡았고, 화서문을 상징한 춤집단MIN은 강인하면서도 세심한 움직임으로 한삼과 몸짓이 하나가 된 무대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큰 환호성을 이끌어냈다. 또한 끊기지 않고 원테이크로 공연되는 작품이기에 사대문 각각의 이야기가 달빛 아래 하나의 수원화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몰입감을 주었다.
<문루, 깨어나다>는 2016년 초연 이후 매년 발전을 거듭하며, 특히 올해는 사대문의 뚜렷한 특징과 작품에 참여한 다양한 무용 단체와 장르 간의 결합이 돋보였다. 각각의 문들은 하나의 단체가 맡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무용단이 맡아 각기 다른 색감과 해석을 더한다. 예를 들어, 맨 처음 등장한 달무리는 발레의 섬세함을, 화서문의 한삼을 가지고 추는 춤은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을, 창룡문의 역동성은 수원화성의 역사를, 장안문은 한국춤의 전통적인 춤사위를, 팔달문은 섬세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은 이러한 연출과 구성이 있기에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고 다채롭고 풍성하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으며, 한 가지 장르가 아닌 복합적인 장르를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고 전했다.
공연 당일, 정조테마공연장에는 많은 관객분들이 자리를 채웠다. 큰 공연장 객석의 약 3분의 2가 가득 찼고, 공연 내내 관객들은 집중하며 무용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해 주셨다. 무대를 하면서도 관객들의 몰입감 있는 반응이 느껴졌는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터져 나온 박수 소리는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잘 전달됬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몇몇 관객은 눈물을 닦으며 무대에서 퇴장하는 우리를 향해 힘찬 박수를 보내주셨고, 다들 본 공연이 수원화성의 대표적인 무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하며 사대문에서 느낀 개개인의 다양한 반응과 해석이 재미있었다.
무대를 하면서, 또 이렇게 글을 쓰며 무대를 회고하면서, 이번 공연이 단순히 한 번의 무대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공연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문루, 깨어나다>는 수원화성의 역사와 가치를 춤으로 재현하며, 우리의 전통과 현대적인 감각을 연결하는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수원에서 자라며 수원화성을 오랫동안 봐온 나 자신으로써 <문루, 깨어나다>, 그리고 수원화성의 사대문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매년 작품에 참여하기도 하고, 관객으로서 관람하면서 계속해서 발전되고 새로워지는 해석과 무대 연출, 그리고 춤을 통해 더욱 다채로워지는 공연은 앞으로의 수원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지닌 가치는 일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특별한 시선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본 작품이 수원화성문화재를 재조명하고, 수원 시민분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부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더 나아가 수원 시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역사의 한 조각을 더 많은 이들이 다 함께 수원화성의 이야기를 듣고, 그 숨결을 나누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다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