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세요
행복은
빛나는 장미 한 송이가 아니라,
수북하게 모여있는 안개 꽃다발이란 것을
가수 신해철의 음악도시 라디오 클로징 멘트.
누군가 행복을 무어라 정의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가 말했던 문구를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행복하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주관적이다. 어느날 행복에 대해 지인들에게 물었다. 대부분 먼 미래의 바램을 늘어놓았다.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이상, 꿈, 목표에 가까운 이야기가 쏟아진다.
“복권에 당첨돼 회사 그만두면 행복할 것 같아” “내 집 하나 마련하면 행복하겠지.” “아기가 좀 크면 행복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행복에 대해 물으면 어떨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비교적 가까운 시간을 이야기했다. 산타할아버지 한테 선물을 받아서, 오늘은 학원에 가지 않아서, 친구랑 하루 종일 놀아서 행복하단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아!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일곱살 때 나는 뭐가 행복했지?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 때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다 보니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다. 어린 시절 소소한 추억거리가 물꼬를 튼다.
내게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은 통계학이 아니다
내게 행복이 뭐라고 묻는다면 일 순위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말한다. 그럼 다이어트는 언제 하냐 묻는 사람이 있다. 웃프지만 내려놓은 지 조금 됐다. 50kg, 40kg … ….. 숫자에 얽매이다 보면 강제운동, 강제 식이제한을 해야 한다. 과거의 나였다면 강박적으로 살을 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난 몸에 스트레스를 주느니 건강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적당히 맛있는 거 먹으면서 살자는 마인드로 변했다.
행복은 주관식이지 객관식이 아니니까. 월급 200만원에서 300만원이 된다고 행복할까. 물론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게 커지고 커리어가 쌓인다면 행복할 것이다. 문제는 숫자에 치중된 가치가 영원할 것이냐는 거다. 숫자가 커질수록 내 희망범위도 늘어나고, 씀씀이는 커질 것이다. 과거 이만큼 벌었으면 소원 없겠다의 바램은 잊은 지 오래. 더 많은 연봉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또 다른 꿈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행복은 일등부터 꼴등까지 전국 고사 순위 매기기가 아니다.
누구나 마음먹기 나름,
건강한 노력이 필요하다
삶은 롤러코스터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작년 나는 건강을 위해, 정확히는 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새해엔 몸과 마음 모두 다 건강해지자가 내 소망이다. 지난해 두 차례의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사진첩을 보며 즐거웠던 순간을 회상했다. 혹시나 안 깨어나면 어쩌지? 그래도 이 삶에 미련 없다고 되뇌었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살고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후속 치료가 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깨어나서 찾은 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저 이제 커피 못 먹나요? 수술 후 깨어나 담당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은 단 것만 아니면 되고 커피를 먹게 되면 그 양만큼 물을 마셔야 된단다. ‘마셔도 돼요’ 라고 말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어찌나 기쁘던지. 그러나 나는 앞으로 술은 평생 마실 수 없고. 맵고 짠 가공육은 피해야 한다. 그 밖에도 제한적인 생활이 있지만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다.
다시 한번 인생 이 회차를 살게 되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건 하는 편이다. 걱정부터 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하기엔 아까운 시간이니까. 제목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행복은 찬란한 꽃 한 송이가 아니다. 작은 즐거움이 하나 둘 모여 큰 행복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마다 외할머니, 엄마, 아빠, 나 모두 다 함께 강원도에 놀러 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그때 행복했다. 주말마다 엄마 아빠와 이마트나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고를 때 행복했다.
때론 목표와 조건을 이루는 삶도 멋있다. 내가 빛나니까. 하지만 그 모습을 이뤄가는 과정 속에서 얻는 즐거움도 분명 있을 것이다. 행복은 들여다보지 않은 사소한 경험으로 시작된다.
꼭 빛나지 않아도 된다. 작은 안개꽃을 하나씩 갈무리해 모아보자. 수북한 안개꽃 사이 깊고 진한 향이 오래도록 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