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피스] 삶을 살아가는 한 걸음이 담긴 만화, 치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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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스터피스를 이해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한 걸음을 그리는 작가 치즈를 소개합니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만화와 일러스트를 병행해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 치즈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특히 만화를 시작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처음 그림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유치원 미술 시간에서였어요. 제 이름에 '소' 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그 당시 유독 소를 열심히 그렸던 기억이 나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제 그림을 들어서 친구들에게 보여주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그때 저는 '그림은 정말 재미있고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하. 그 이후로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만화를 전공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당시 저는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만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준비했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그림을 계속 그리려면 예술고등학교에 가야만 할 것 같았고, 저는 애니메이션 풍의 그림을 그리니까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었죠.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꾸준하게 칭찬을 들어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믿으며 한 학기만 준비하고 지원했거든요. 결과는 당연히 떨어졌죠. 하하.
그런데 그 사실이 그 당시의 저에게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어요. '왜 입시에 실패했지? 만화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절박함이 생기게 되었고, 내가 '만화'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진지하게 만화를 전공으로 정하고, 3년 내내 대입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 실패의 경험이 현재의 진로를 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네요. 이전까지는 만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해주셨는데, 이후 만화를 진지하게 그리게 되며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이 있다면.
예전에는 만화가 그저 홀로 작업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조용한 분위기에서 혼자 작업할 수 있는 점이 저와 잘 맞는 만화의 매력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초반에 제가 그린 만화를 살펴보면 대부분 제가 느낀 감정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 많아요.
그런데 대학교에 와서 저와 비슷한 분야의 친구들을 만나고, 만화에 대한 경험을 나누다 보니 제 생각이 변화할 수 있었어요. 이전까지는 제 만화가 누군가에게 노출되고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는데 친구들이 제 만화를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세심하게 나눠주면서, 저의 만화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죠. 그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이후로 만화를 그릴 때는 저의 만화를 읽는 독자에 대해 고민하며, 좀 더 다채로운 주제나 배경 등 만화의 요소들을 넣으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경험 했기에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치즈의 만화
- 초반에는 작가님 위주의 작품을 그린다고 해주셨어요. 작가 위주의 만화라니, 특정한 작품으로 예시를 들어줄 수 있을까요?
[예전에 살던 동네]라는 단편 만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이 만화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잘 모르는 주인공 서진이가, 어느 날 엄마의 잔소리에 못 이겨 억지로 어린 남동생을 데리러 놀이터에 갔다가 그곳에서 남동생 또래의 유령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예요.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서진이만 볼 수 있는 유령이 서진이의 집에 함께 살게 되며, 서진이는 계속 그 유령을 신경 써주게 되죠. 그 과정에서 유령이 왜 서진이의 집에서 머물려고 하는지 알아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만화는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등장인물의 설정, 가족 관계, 주택가의 배경 등 모든 것이 저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한 만화죠. 특히 서진이의 가족이 갖고 있는 분위기도 저희 가족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많이 닮았어요. 타인에게 읽힐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제가 제가 살았던 동네와 저희 가족으로부터 느꼈던 감정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미래의 제가 그 만화를 보았을 때 제가 남기고자 했던 바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든 만화였습니다.
- 작가님의 SNS 어디에서도 [예전에 살던 동네]를 지금은 특정 플랫폼에서 외에는 살펴보지 못하다는 점이 참 아쉽네요. 혹시, 이러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자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 소개해 주신다면.
서진이가 어린 유령을 내쫓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굉장히 비싼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나가달라고 부탁하는데, 서진이는 정말 애써서 이야기를 하죠. "네가 여기 계속 있으면 가족들도 무서울 것이다. 너는 잘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에요.
사실 어린 유령이 계속 서진이의 집에 머물고 싶어했던 이유는, 서진이의 가족이 갖고 있는 따뜻함이 부러웠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서진이는 그저 자기 기준에서 좋아할 만한 것, 즉 비싸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부탁을 하는 거죠. 서진이는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친절을 베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유령이 원하는 것에는 닿을 수 없었던 서진이의 서툰 마음이 느껴지도록 표현하고 싶었었습니다. 많이 공을 들인 부분이라 장면 중 하나를 소개해 주신다면 해당 장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대학에 가게 된 이후 독자를 고려하여 만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해주셨는데, 그 변화가 드러나는 작품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그렸던 작품 중 [내 꿈속의 너]라는 단편 만화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만화이기도 합니다.
[내 꿈속의 너]는 제가 처음으로 판타지 세계관을 그린 단편 만화예요. 사실 그 전까지 저는 판타지 세계관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교수님께 피드백을 들으며 "판타지스러운 만화를 표현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타인에게는 나의 그림이 판타지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구나. 잘 어울리는 만화를 그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면서 단순히 저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타인에게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작품입니다.
또, 이 작품을 저의 대표작으로 소개해 드리고 싶은 이유는 만화를 그릴 떄 독자를 고려한 것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저 역시 정말 행복한 감정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신경 썼던 작품이기 때문이에요. 콘티 단계부터 완성까지, 저는 이 작품에 정말 큰 애정을 담아 작업했거든요.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리는 사람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담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만화 작업을 진행할 때는 항상 행복한 상태에서 작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정도였죠.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을 느낄 때만 이 작품을 그리며,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담아 완성한 그림입니다.
- 작가님께서 그렇게까지 애정을 담은 작품이라니 저 또한 다시금 만화를 따뜻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네요. [내 꿈속의 너]는 어떻게 그리게 되었던 그림이었나요?
제가 작년에 잠을 정말 잘 못 잤어요. 혼자서 자취를 하던 중이었는데, 당시 저는 카페인이 제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거든요. 그래서 매일 커피를 마시며, '왜 나는 잠을 자지 못할까?'라고 생각했어요. 하하. 그럼에도 카페인 때문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당시의 저는 그저 제가 걱정이 많아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잠을 잘 잘 수 있을지 스스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잠들기 전에 꼭 샤워를 한다든지, 이불을 항상 청결하게 한다든지 하면서 유독 관리에 신경을 썼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렇게 저의 '잠'에 정성을 들이는 과정에서 문득 꿈에 대한 생각을 함께 하게 되었어요. 만약 꿈에 어떤 아이가 나오는데, 사실 그 아이가 꿈에 나오는 이유가 좋아하기 때문이고, 그 사실을 주인공은 전혀 모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당시 제가 즐겨 들었던 [민수는 혼란스럽다]라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 이야기를 계속 구상하게 되었어요.
그때 내가 그렇게 굴었던 건 진심이 아녔어
돌아서지 않을 줄 알았던 네게 나쁘게 한거야
너에게 자꾸 원치 않던 말로 상처 주는 날
미워해도 좋아
사실 나의 맘은 그게 아냐
너를 아주 원하고 있어
- 민수는 혼란스럽다, 민수
또, 마침 학교에 ‘청강 홀’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 홀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처럼 생긴 건물이었는데, 저는 그곳을 보며 항상 마법학교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마침 판타지를 배경으로 만화를 그려도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홀을 바탕으로 마법 학교를 배경으로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내 꿈속의 너]입니다. 작년 겨울에 구상을 시작했던 작품인데, 올해 들어 제가 카페인이 안맞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하하, 잠을 잘 자게 되면서 구상할 때와는 다르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충분히 좋은 컨디션으로 최선을 다해 그릴 수 있었던 작품이에요.
- 처음 그리는 판타지 배경이었다보니 어려운 부분이 있지는 않았나 싶은데.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정말 막힘 없이 그렸던 작품이었거든요. 오히려, 기존에 현대 배경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고증 등을 따지다 보니 작업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그런데 판타지 작품을 그리면서 제가 만든 세계관 안에서 제가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조금 더 수월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래서인지 저만의 색을 더욱 잘 담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저는 제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 따뜻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하거든요. 단단함 없이 말랑말랑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그림을 추구해요. 그런 점에서 [내 꿈속의 너]는 특히 이불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질감을 가득 담아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 그 외에도, 애정을 갖고 소개해 주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최근 만화 중 [나무의 안부]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무의 안부]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회피적인 성격을 가진 주인공 재준이 이혼 후 산속으로 도피하는 이야기예요. 그 과정에서 만난 500년 된 나무를 만나고, 그 나무가 친구 다민과 재회할 수 있도록 돕게 되죠.
저희 학교가 산속에 있다 보니, 학교 강의 중에 ‘오감느낌 숲 명상’이라는 강의가 있는데, 이 강의는 매주 산에 올라가서 산책하고 명상을 하는 수업이었어요. 매주 산에 올라 가까이에서 관찰하니 산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죠. 일반적으로 자연은 가만히 있는 존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 강의를 통해 나무가 살아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나무가 정말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몸소 실감할 수 있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무를 등장인물로 하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어요. 이 만화를 그리면서 나무를 그리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 해당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회피 하다보면 고립이 된다'죠. 굉장히 뚜렷한 주제를 갖고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도 있을까요?
제가 홀로 자취를 하다 보니 가족들과 자주 연락하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저희 학교가 산속에 위치해 있다 보니 고립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어요.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본가에서 도망쳐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때도 종종 있었어요.
저희 가족 구성원은 저까지 총 4명이었고, 저는 이전까지 항상 다른 3명의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거든요. 처음 가족으로부터 멀어진 그 순간, ‘관계에서 도망쳐 혼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외롭구나. 기존의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은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주인공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사실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이 그 직후에는 굉장히 후련하잖아요. 실제로 그 후련함을 느끼는 주인공을 그려보고 싶었죠.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과연 그것이 건강한 방법일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자 했어요. 그렇게 관계를 단절시킬 수록 외롭게 혼자가 되는 길일 수도 있다고, 마주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 방법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 실제 작가님께서 느끼셨던 고립의 경험이 많이 녹아든 만큼, 만화를 그리며 크게 와닿은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가장 마음에 깊이 다가왔던 장면이 있다면.
저와 재준이라는 인물이 마음이 통한다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이 있어요. 재준이 처음 산으로 들어가 컨테이너에서 첫날밤을 지낼 때였죠. 혼자 자면 정말 고요하잖아요. 타인으로 인한 소음이 없으니까요. 그 고요함 속에서 생각이 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어요. 이전에 들었던 말이나 했던 생각이 마치 저를 맴도는 소리처럼 느껴지는 거죠.
재준이 첫날밤, 아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그 말을 소음처럼 표현하고, 이후 그 말을 불편해하며 휙 돌아눕는 장면을 그리면서 너무 제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 재준의 도움을 받아 다민과의 갈등을 마주하고 화해한 나무가, 마지막에는 결국 악기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어요. 나무를 꼭 사라지게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요?
나무가 사라진다는 엔딩은 처음 만화를 구상할 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만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나무는 자신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설정이었거든요. 재준에게 모습을 드러내서 다민이와 빠르게 화해하고자 했던 이유도, 자신이 사라지기 전에 이별을 해야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다민이와 나무가 서로를 마주보고 성숙한 이별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둘의 화해가 재준을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나무의 마지막이 필수적이었네요.
만화를 살펴본 후 함께 보는 치즈의 작품관
- 앞서 해주셨던 말씀 중 '포근하고 말랑말랑하다'는 표현이 정말 작가님의 작품과 딱 들어맞네요. 이런 그림 스타일을 확립하며 영향을 받았던 대상이 있었을까요?
학원을 다니며 저를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의 영향과,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특히 선생님께서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었어요. 학원을 다니기 전까지는 저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기보다는 입시에 성공하기 위해 드로잉을 탄탄하게 그리는 데에 집중을 많이 했어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무리를 많이 했던 그림 같아요.
하지만 선생님의 그림을 본 이후, 저는 "단순히 완성도 높은 그림이 아닌, 내가 누군지를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그림은 그 자체로 따뜻함을 전해주고, 그 그림을 보면 선생님을 느낄 수 있거든요.
- 작가님의 작품을 살펴보니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 추구하시는 만화의 방향성과도 연관이 되는 부분일까요?
저는 ‘감정을 중시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제 만화들을 오랜만에 다시 훑어보았는데, 대부분 감정에 몰입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 만화들이더라고요. 감정적으로 몰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만화인 거죠. 그런데 그만큼 감정적으로 충분히 몰입한다면, 굉장히 큰 위로를 전달할 수 있는 만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저도 작업을 하면서 항상 ‘나도 이런 감정을 느꼈었지, 이런 감정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사실 감정은 처음 나에게 다가오면 굉장히 두렵고 무섭게 느껴질 수 있잖아요. ‘화가 났다’고 해도 ‘이 화는 어디에서 온 걸까? 나는 왜 이렇게 격한 감정을 느끼는 걸까?’ 하며 두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두려움을 감싸며, ‘그런 감정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만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어요. 단순히 감정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배경을 함께 이야기하고,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만화를 그리려는 것이 바로 제 만화이자 제가 추구하는 방향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러한 저의 방향성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이 바로 주인공이 성장인 것 같아요. 단순히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크게 대단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전의 나보다 조금 더 삶을 잘 가꿀 수 있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죠. 그리고 주인공이 그렇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용기를 독자님들께서 함께 느끼며, 제 만화에서 긍정적인 힘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해피 엔딩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아요.
-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품을 하나씩 살펴보니, 모두 사람 관계 안에서의 감정에 대해 집중하고 있고 그 다양한 감정들 중 가장 핵심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그 과정에서의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작가님께 여쭤보고 싶어요.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랑은 무엇인가요?
제가 그렸던 만화 중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라는 작품이 있어요. 좀비 사태에 빠져 두 친구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상황인데, 그들이 서로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어 나눠 먹는 내용이에요.
저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요.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꾸준히 사랑하는 존재를 사랑하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과 사람은 너무나도 다른 존재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에서 말을 나눌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너무나도 다른 별개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내서 만나고,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생존 본능이잖아요.그런데 그 생존 본능을 현실로 연결시켜주고 충족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연결점이 바로 사랑이라고 느껴요. 그래서 저에게 있어서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필요하다는 의미 같기도 해요. 타인을 필요로 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니까요.
- 지금까지 작가님께서 그리셨던 작품 모두 각각의 특색이 담겨있어 참 다채로운 것 같습니다. 이 중 작가님께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에 가장 부합한 작품을 하나 꼽는다면.
장르적인 방향성으로는 [내 꿈속의 너]가 많이 가깝지만, 처음으로 제가 그리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도전하고 완성했다는 점에서는 [나무의 안부]가 더 가까운 것 같아요. 특히 [나무의 안부]는 제가 처음 제대로 도전했던 웹툰 형식의 만화였거든요.
저는 원래 출판 만화를 선호하는 편인데, 학교 전공 수업에서는 웹툰을 주로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웹툰을 시도하게 된 것 같아요. 웹툰은 스마트폰 화면에 맞춰 컷을 구성하다 보니 다음 컷으로 넘어갈 때 어떤 장면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잖아요. 저는 성격상 예측 불가능한 점에서 큰 자극을 느끼는 경우가 많거든요.
반면 출판 만화는 페이지를 한 번 넘기면 두 면에 있는 컷을 미리 훑어볼 수 있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어느 정도 예상하며 천천히 읽어갈 수 있어서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이러한 제가 웹툰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준 것이 [나무의 안부]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방향에 도전하며 제가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를 오롯이 완성해나가고 싶어요.
- 앞으로는 어떤 만화를 그리고 싶나요?
앞서 지브리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지브리 작품 중에는 우울할 때 ‘죽고 싶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작품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지브리의 작품을 보며 큰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우울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가 될 정도로 따뜻하고,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순수하게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제가 학교에 와서 학우들의 만화를 읽다 보니 정말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더라고요. 순수하게 재미있다는 것은 만화에 깊은 의미를 통찰하지 않아도, 읽는 그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흡입력 있고 즐겁다는 뜻이잖아요. 읽는 순간에 몰입하여 좋아하고, 재미있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 앞으로 그리고 싶은 만화의 특정한 주제 혹은 키워드도 있을까요?
[나무의 안부]와는 또 다른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어요. 나무의 안부에서는 개인의 고립에 집중하며 자아성찰적인 면이 많았잖아요. 저는 곧 학부 과정을 졸업하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의 앞날을 응원해주며 이별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만화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이야기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구상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없어요. 그려보고 싶은 장면이 먼저 떠오르고, 그 장면에서 이야기를 확장해나가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해지거든요. ‘이런 내용과 메시지를 그려야지’ 하고 그린 적은 없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이야기해도 나중에 그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하.
치즈 작가가 완성하는 장면의 포착, 일러스트의 세계
- 저는 작가님의 만화 뿐만 아니라 일러스트도 참 좋아해요. 저는 만화와 일러스트가 너무나도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는데, 함께 그리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일러스트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제가 일러스트를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진심을 다해 그렸던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 입시가 끝난 뒤였어요. 사실 입시 만화는 4시간 안에 두 페이지의 만화를 완성해야 하다 보니 굉장히 급하게 그려야 하잖아요. 그 과정에서 항상 그림에 대한 아쉬움이 커지더라고요. ‘온전한 한 장을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에 재수를 시작하며 일러스트를 하나씩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그렇다면 가장 처음 아쉬움을 풀어냈던 일러스트를 소개해 주신다면.
제목은 딱히 없지만 아래의 그림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노란색 곱슬머리 여자아이 캐릭터가 식탁에서 촛불을 켜고 파이를 먹는 장면을 그렸던 일러스트예요. 입시가 끝나며 오롯이 제가 좋아하는 것만을 담아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렸던 그림이죠. 아무런 목적성 없이, 그리고 주어지는 주제 없이 그저 제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서 완성한 그림이라 이 그림을 다 그렸을 때 정말 기뻤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전에는 SNS에 그림을 올린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이 그림을 그리며 SNS에 업로드한 뒤 많은 분들의 반응도 얻을 수 있었던 그림이에요. 지금 생각해도 저에게 상징적인 그림이라 참 소중한 그림입니다.
- 저의 편견이었을까요? 처음 완성하는 원하는 느낌의 그림이었으니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해방감'이 담겨있는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히려 분위기는 조금 어둡고, 소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입시할 때는 최대한 저의 장점을 살려서 작품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제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제한되어 있었어요. 또, 아무래도 눈에 띄는 그림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칙칙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이 밝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 속 웃는 얼굴 혹은 우는 얼굴 등 감정적 변동폭이 큰 그림을 그려야만 했죠. 그래서 이 그림은 그러한 제한 조건에서 벗어나 어떤 표정이든, 어떤 색이든 그저 제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던 그림입니다.
- 그 외에도 저는 작가님의 [타로카드 시리즈]를 참 좋아해요. 특히 만화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작가님의 다채로운 색상을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저도 [타로카드 시리즈]를 좋아해요. 별, 악마, 심판, 운명의 수레바퀴로 총 네 개의 시리즈로 제작한 일러스트에요. 과제로 시작해서 차츰 완성해간 시리즈죠.
이 중 가장 즐겁게 그렸던 것은 별 일러스트에요. 산과 바다가 같이 나오도록 표현했죠. 이 그림을 그릴 때 생명력을 표현하려고 많이 공을 들였는데, 그래서 산에서 소녀가 물을 뿌리면 그 물에서 생명력이 넘치듯 세균 같은 것들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습니다.
- 작가님께서 개인적으로 느끼시는 만화와 일러스트의 차이점이 있다면.
일러스트에 비해 만화가 고려하는 부분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아요. 만화 같은 경우에는 가독성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에, 시선의 흐름부터, 말풍선의 위치, 감정의 전달까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하지만 일러스트의 경우에는 제가 조금 더 계획 없이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어요. 만화에 비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직관적으로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일러스트를 그릴 때는 종종 제가 도피성으로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반대로 만화를 그릴 때는 일러스트가 어려워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싶기도 하고요. 하하. 그렇다고 둘 중에 무엇이 더 좋냐고 하면 콕 찝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제가 좋아하는 두 개의 사이에서 계속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무리 지으며
- 작가님께서 만화를 그리며 들었던 피드백 중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피드백이 있다면 하나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근 저의 친한 지인이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너는 네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것을 보는 이도 함께 사랑할 수 있게끔 만화를 그린다, 그건 쉬워 보여도 참 어려운 일인데 너의 만화에는 그것이 담겨있다’고 말해줬어요. 그게 굉장히 큰 감동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이전까지 저는 제가 사랑한다고 해서 남들도 쉽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만화를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척 기뻤습니다.
- 함꼐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인사 부탁드립니다.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신다는 것, 그리고 작품에 대해 피드백을 남겨주신다는 것을 정말 그 자체로 너무나도 감사한 것 같아요. 한 사람의 모든 활동을 좋아해 주고, 응원해 주고, 지켜봐 준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시는 분들을 보면 이만큼이나 어려운 것들을 나는 받고 있구나, 생각이 들며 무한하게 감사해집니다. 앞으로도 저는 믿음을 갖고 볼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푸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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