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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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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월의 하노이는 날씨가 늘 좋아서, 호안끼엠 호수를 혼자 거닐기에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날이 좋지 않던 단 하루는 호텔 방에 처박혀 극심한 우울에 빠져 있었다. 시험이 끝난 후 부랴부랴 시작한 단기 알바로 겨우 마련한 돈은 여행 끝 무렵이 되자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저렴한 호스텔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지은 지 족히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블루 하우스 호스텔’은 아쿠아마린 색으로 칠해져 나름 화사한 느낌을 주었다. 첫째 날 저녁, 같은 방을 쓰던 두 일본인과 말을 나눴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번역기로 애써가며 대화를 겨우 붙여나갔다. 이미 한 달 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그들은 재즈 바에서 공연을 하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한 채 친숙하고도 낯선 이들을 따라나섰다.

 

숙소로부터 북쪽을 향해 2km가량 떨어진 ‘노스 게이트 재즈 펍’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인파 속에서 활기를 띠었다. 가게 밖까지 이어진 수십 명의 외국인 부대는 타이거 맥주를 든 채 몸을 흐느적거렸다. 나무 향마저 알코올에 다 날아간 듯한 그곳은 불교 문양의 붉은 타일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어 동양적인 분위기가 흠씬 풍겼다. 일본인들의 지인이라고 했던 사람이 무대 중앙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검정 가죽 바지에 체 게바라 티셔츠, 그리고 짙은 아이라인을 그린 남자는 스탠드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자기가 부르는 노래에 심취해 있었다. 생소한 베트남어 가사 속에서도 익숙한 멜로디가 귀를 간지럽혔다.

 

레게 머리를 한 긴 수염의 바텐더에게 가,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는 앞에 밀린 주문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곡선으로 꺾인 긴 테이블 바에 기대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두 외국인이 다가왔다. 생글거리면서 다가온 사람과 달리, 다른 한 명은 당장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은 듯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디에서 왔어?’

 

타국에서는 수십 번을 증명해야 하는, 닳고 닳은 질문을 또 듣고야 말았다. 그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대학생들이었다. 갭이어를 맞아 3개월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새 할 일을 끝마친 바텐더에게서 맥주를 건네받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우린 너 본 적 있어.’

 

‘어디에서요?’

 

‘그 호수에 있던 사원에서.’

 

호안끼엠 호수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는 응옥썬 사당으로 뻗어 있는데, 그곳에는 수백 년을 산 두 마리의 거북이 영광스럽게 박제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은 휴대폰 플래시를 번쩍이며 그 영광을 자식과 한 화면에 담았다. 장수라는 표상으로 모자라 영구히 장식되는 기분이란 무엇일까.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생명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참 지독한 일이었다.

 

‘그래요? 신기한 우연이네요’

 

연신 질문을 해대던 사람은 또 다른 먹잇감을 발견했는지 얼른 자리를 비웠다. 그 옆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있던 사람과는 꽤나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정쩡한 인사를 하고 일본인들에게로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이 노래 알아요?’


4. 그 아이는 매끈한 몸을 감추는 헐렁한 후디를 입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밀려오는 당혹감을 지우고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드네요.’

 

‘1960년대, 미국 포크 듀오인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예요. 원래 둘은 음반 성적이 좋지 않아 해체했었는데, 이 노래가 다시 인기를 끌면서 영국에 있던 사이먼이 미국으로 다시 건너와 재결합했죠. 침묵 소리가 엄청난 환호를 불러온 셈이에요.’

 

‘역설적이네요. 생각해 보니 집에 이 앨범의 LP판이 있던 것 같아요. 근데 이 노래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때는 그쪽 부모님도 태어나기 전일 것 같은데.’

 

나는 가수에게서 시선을 떼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시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 아니라 감상에 젖어 있는 얼굴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셨어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생전에 그렇게 책을 가까이하셨다던데, 알고 보니 문맹이셨어요. 당신의 패를 은밀하게 감춘 채,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는 목소리와 몸담고 있던 세상에 관심을 가지셨던 거죠. 그런데 당신에게 책을 읽어줘야 할 아이가 태어나니 난감했던 거예요. 그래서 수고롭지 않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대체품을 찾았던 거죠. 그리고 우연히 처음 구입한 음반이 이 노래가 수록된 사이먼 앤 가펑클의 1집이었다고 해요.’

 

J의 말에 문득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가 떠올랐다. 1950년대 독일, 서른여섯의 한나를 마음에 품은 열다섯 소년 미하엘은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샤워를 함께 하고, 사랑 행위를 하고, 나란히 눕는 꿈결 같은 일상을 보낸다. 8년 후,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우연히 법정에서 한나를 마주치는데, 그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에 들어갈 유대인들을 선별한 죄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글을 읽지 못했던 그녀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하지 않은 모든 일을 뒤집어쓴다. 한나는 감옥에서 18년 동안 미하엘이 녹음한 테이프로 글자를 익혔지만, 석방 전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영원히 들추지 못할 더럽고 가엾은 치부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의해 헤집어졌을 때의 상실감이란. 그럼에도 J의 할아버지는 남겨질 아이를 위해 음악이란 대체품을 찾아냈던 것이다. 약점이 될 수 없는, 당신의 후손에게도 대물릴 수 있는 이야기를 말이다.

 

‘신기하네요. 그렇게 수십 년 뒤에 당신이 먼 타지에서 이 노래를 다시 듣다니. 정말 재미있는 우연이에요.’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단 한 번도 힘 줘 본 적 없는 듯한 서늘한 눈매를 장난스럽게 둥글리며 대답했다.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J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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