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전쟁과 현대, 그 고통의 공명 - 붉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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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아야겠다는 결심은 작품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작품을 알게 되고 '붉은웃음'이라는 제목이 가진 의미가 궁금해졌고 연극의 시놉시스를 보고 나니 더욱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연극 '붉은 웃음'은 1904년 전쟁의 광기 속에서 고통받는 형제와, 2024년 작은방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무대는 바닥에 깔린 흙 위로 왼쪽은 쓰레기 더미, 오른쪽은 책상과 의자 아래 흩뿌려진 종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무대 안에서 1904년과 2024년을 동시에 나타낸 것이다. 시대적으로 약 100년이 넘는 시간 차이가 나지만 둘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잘 어울렸다. 오히려 작품이 진행될수록 이 둘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중첩되어 하나의 상징적인 메시지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연극은 러일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온 용사가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와 현대 사회의 고독사 문제로 파괴되는 개인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전쟁의 비극을 현대 사회의 젊은 세대가 직면한 고립과 좌절의 문제와 관련지어 나타내었다는 점이 새로웠다.
1904년의 전쟁과 2024년의 고독은 시대적 차이를 뛰어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통과 외로움을 대변한다. 전쟁의 잔상으로 절망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형제와 현대 사회에서 고독에 갇힌 청년이 겪는 내면의 갈등은 매우 유사하다. 연극은 이들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하나의 심리적 공간을 창출한다.
연극을 보는 내내 둘의 관계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 중 왜 하필 청년 고독사 문제를 연결 지었을까?’
연극은 두 갈등을 교차시키며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고독과 절망을 탐구하고 있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고통받는 형제와 현대의 고독사 문제를 엮은 이유는, 결국 두 시대가 겪는 고통이 본질적으로는 같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청년 고독사 문제는 모두 개인이 사회적, 정서적 고립과 무력감을 겪으며 그로 인해 생기는 깊은 절망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선택하지 않은 시기에 이 나라에 태어난 청년들 또한 전쟁에 끌려간 영혼처럼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까? 두 경우 모두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채 결국 생명력마저 소진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전쟁은 강제적이고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개인을 고립시키고, 청년 고독사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환경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고립이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고통과 절망은 본질적으로 유사하게 느껴진다.
연극을 통해 고독사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 청년이 방 안에서 혼자 고독하게 생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들은 너무 날카롭게 다가왔다. 죽어가는 과정을 무기력한 모습이 아닌 몸 안에서 죽음에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와 꿈틀거리는 에너지로 역설적으로 표현한 모습이 더욱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연극에서 청년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단순한 고독과 무기력의 표현을 넘어 죽음에 저항하는 생의 의지와 그 속에서 움트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보여준다. 그 과정 속 느껴지는 감정의 역설과 진지함은 마음 깊이 울림을 주었다.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살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강한 인상을 남겼고 고독 속에서조차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찾으려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무대의 전환이 크지 않고 배우 혼자 무대를 꽉 채워야 하는 1인 극이었지만 그동안 봐왔던 어떠한 공연들보다도 훨씬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배우의 연기와 감정선에 집중하게 되면서 무대의 단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공연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다.
연극이 거창한 교훈을 주지 않고 소박한 기도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이야기는 고독한 청년들을 도와주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 그저 슬픔을 나누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내용을 전하며 마무리된다. 작은 무대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결국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진심 어린 감정들이 큰 감동을 주며 작은 위로와 공감의 힘이 큰 울림을 남겼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김서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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