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의 미술 대학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다. 실기 시험을 치는 날 아침, 미술 대학 각 과의 학생회 선배들이 직접 만든 현수막을 들고 응원하는 것이다. 나도 그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에 들어갔고, 학교에 입학하여 학생회 일을 하면서는 직접 현수막을 제작하고, 응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추운 아침 공기를 맞으며 걸어오는 수많은 학부모들과 수험생들을 보며 불과 몇 년 되지 않던 시절의 추억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그 많던 미술 입시생들은 자라나 미대생이 된다. 소위 말하는 '인서울 학교'들의 미대생 정원은 총 1500명 가량이고, 전국을 통틀어 보자면 훨 많을 것이다. 매년 수많은 학교들의 졸업 전시가 열리고, 졸업생들이 배출된다. 그들의 작업을 보기 위해 학부 내내 선배들, 혹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 여는 전시들을 보러 다녔고, 그 과정에서 이렇게 좋은 작업을 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이 학생들 모두가 졸업하고 작가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대학교에서는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소양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만, 누가, 어떤 과정을 통해 작가로서 살아남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으니 말이다.
[예술가는 쉽게 사라진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전시를 보러 갔던, 내게 나름대로 뜻깊었던 수업에 대해 먼저 말할 필요가 있겠다. 학부 2학년, 전시를 앞둔 시점에서 들었던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처음 수업을 맡은 분이셨고, 나는 그 분의 첫 수업을 듣는 첫 제자였다. 그림에 대한 단점이 아닌, 장점을 얘기하는 등 매우 독특한 커리큘럼이 주를 이루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이어 선생님도 무척 솔직한 분이었기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말을 굉장히 자주 하셨다. 이에 처음에는 망설이던 학우들도 조금씩 질문을 시작했다.
작가를 하면 얼마나 버는지, 작가를 하려면 몇 개의 일을 병행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지, 석사 이상의 학위가 꼭 필요한지 같은, 학교에서 공개적으로 물어보기에는 민망한 질문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가 생활을 하며 겪는 어려움은 얼핏 들어 알고 있었지만, 최소 투잡, 보통은 쓰리잡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그렇게 번 돈의 대부분은 작업 활동에 쏟아붓는다는 일을 가까운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그것이 작가의 생활을 생생히 들은 직후의 첫 감상이었다.
그 수업 중 하루는 종일 5개가 넘는 전시를 보러 다녔다. 그 전시 중 하나가 현재는 없어진 을지로의 전시 공간 [브레이브 선샤인]에서 이루어진 남수르 작가의 [신여성] 전시였다. 생동감 있는 색채와 큰 화면을 채운 여성들, 그리고 그 여성들의 눈 속에 담긴 이유 모를 공허까지.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듯한 그림이라는 생각을 하며 작가의 책을 구매했다. [예술가는 쉽게 사라진다]는 서울에서 회화 작가로 활동하는 남수르 작가의 솔직하고도 슬픈, 작가로서의 삶과 미술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책이었다. 작가 특유의 흩날리는 듯한 드로잉이 책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음에도, 아름답기보다는 슬프다는 감상이 먼저 느껴졌다.
남수르, [예술가는 쉽게 사라진다]
책에서 보여지는 작가란 마치 취업준비생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고, '뽑히기 위한 작업'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써야 하며, 놀라울 정도로 적은 돈을 받고서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n잡을 뛰어야만 한다. 더욱 힘든 것은 이 모든 것들에 정답이 없고, 끝을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취업 준비생처럼 '취업 끝!'하며 끝나는 것이 아닌, 예술가라는 직업을 유지해내기 위해 오래도록, 어쩌면 평생 끝없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구체적인 통계와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낸 덕분에 너무 현실적이다 못해,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같았다.
누군가는 삶에 있어 예술은 굳이 필요치 않다고 얘기한다. 그에 반해 작가라는 직업은 삶에 예술이 꼭 필요하다고 세상에 지속적으로 외치고, 작업을 통해 자신, 혹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타인, 혹은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끊임 없이 세계를 넓혀나가야만 한다. 이토록 삭막한 시대에, 단순히 서점이나 미술관 따위를 방문하여 다른 이들의 작업을 향유하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그들이 그려낸 또 다른 세계를 느끼고, 본인의 세계를 넓혀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예술가들에게 알맞는 제도와, 정당한 가치가 주어지고 있는지도. 남수르의 책은 작가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란 너무도 벅찬 일임을 시사한다. 결국 대중이, 제도가, 그리고 사회가 변하여야만 모두의 세계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