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바람으로의 여행, 유달리 찬란했던 그 시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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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없는 나의 일상은 상상할 수 없지만, 정작 그 음악 속의 정서에 심취해본 경험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 재생목록에는 외출 준비를 할 때 듣는 음악, 밤길 드라이빙 음악, 새벽에 책을 읽을 때 듣는 음악 등 상황별 플레이리스트가 즐비하지만 대부분은 배경음악의 역할에 그칠 뿐 그 자체가 오롯이 감상의 대상이 될 때는 별로 없었다.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은 가사보다는 사운드와 비트로 승부하는 장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만약 내가 다른 세대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면 이 취향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명실상부한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인 80년대-90년대의 음악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당대의 아티스트 중에서도 당시의 시대정신을 음악의 언어로 표현했던 뮤지션을 칭한다면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고 김광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평범한 삶을 풍부한 감성으로 노래했던 그의 음악은 시대를 불문하고 여전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람으로의 여행’도 그의 노래를 뮤지컬 형식으로 재구성한 공연으로, 12년째 롱런하며 누적 관람객 수 15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도 1,000번이 넘는 소극장 공연으로 관객들과 소통했다고 하는데, 이번 뮤지컬 역시도 그의 무대를 옮겨온 듯 아담한 대학로의 소극장 스튜디오 블루에서 진행됐다. 관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팬들 앞에서 잔잔하고도 뜨겁게 노래했을 그의 공연을 떠올려 보며, 또 기성세대의 청춘을 상상으로나마 추억해보며 관람을 준비했다.
첫 장면의 배경은 1994년, 서인대학교의 한 동아리방이다. 기타를 메고 무대에 등장한 인물은 금속공학과 새내기 이풍세다. 김광석 같은 가수를 꿈꾸는 그는 서인대학교 바람밴드 오디션에 보컬로 참가해 ‘그날들’을 부른다. 김광석을 빼닮은 뛰어난 실력에 반한 부원들은 두말할 것 없이 만장일치로 그를 새 보컬로 맞이한다.
하지만 선배들이 회식을 위해 치킨을 사러 나간 사이, 동아리방에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역시나 오디션을 보러 온 신문방송학과 새내기인 최고은이다. 그녀는 혼자 동아리방에 남겨진 풍세를 밴드부 선배로 착각하고, ‘사랑이라는 이유로’를 열창한다. 뒤늦게 돌아온 부원들은 그녀를 코러스 보컬로 세우자는 데 의견을 모은다. 이렇게 바람밴드는 퍼스트 기타 겸 리더 상백, 건반을 맡은 은영, 베이스와 작곡을 담당하는 영후, 퍼커션 포지션의 겨레까지 어엿한 6인 밴드가 되어 대학가요제 본선 진출의 포부를 밝히며 힘찬 시작을 연다.
이들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예선 통과를 손에 넣고, 연습 막바지에 돌입한다. 하지만 늘 순탄하지만은 않다. 음악을 사랑해서 모인 이들이지만, 그 꿈을 계속 붙들기에는 각자의 현실이 무거운 탓이다. 그중에서도 음악인의 꿈이 가장 컸던 영후는 좋은 기회로 음반 녹음에 참여하러 가던 길, 큰병을 앓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급히 찾아간 병원에서 영후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낼 날이 머지않았으니, 어머니가 편히 가실 수 있게 제발 더는 걱정을 끼치지 말아 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한다. 그렇게 다가온 대학 가요제 본선 전날, 영후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무대의상이 아닌 검은 상복을 입고 어머니의 장례식장을 찾은 영후는 사무치는 슬픔에 겨워 아버지와 눈물을 흘린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김광석
이때 장례식장에 누군가 들어선다. 바로 5명의 부원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요제 무대를 포기하고 그의 곁을 찾아 영후를 위로한다. 이들이 모인 목적이자 이유였던 대학 가요제의 무대는 무산됐지만, 함께 슬픔을 나누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진정으로 돈독한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듬해, 다른 남학생들처럼 풍세도 군대에 입대한다. 훈련소로 가는 길이 되어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고은과 풍세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 ‘이등병의 편지’ 속 가사가 마음에 와닿는, 애달프고도 풋풋한 이별이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 않게, 열차시간 다가올 때 두손 잡던 뜨거움.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 어느 이등병의 편지
시간은 훌쩍 흘러가 어느덧 풍세의 전역날, 고은과 풍세, 겨레는 동아리방에서 만난다. 비록 상백과 은영, 영후는 졸업이나 취업 준비로 밴드부 활동을 그만둔 상태지만 이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그러던 중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겨레는 풍세에게 무대가 그립지 않았냐며, 잠시 뒤에 열릴 학교 집회에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무대에서 겨레는 경찰의 최루탄을 맞아 쓰러지고, 풍세도 경찰서로 끌려간다. 풍세는 정부 고위직이었던 고은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나게 되지만 고은은 그 대신 유학길에 올라야 한다. 심지어 최루탄을 맞았던 겨레가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는 소식까지 전해듣게 된다. 그렇게 바람 밴드는 완전한 끝을 맞이하고야 만다. 친구의 죽음과 연인과의 이별을 동시에 맞닥뜨린 풍세는 고은을 떠나보내며 오열한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 사랑했지만
다시 긴 시간이 흘러 어느덧 현재의 시점, 마흔을 넘어선 멤버들은 간만에 한 자리에 모인다. 부부가 된 은영과 상백, 그리고 영후는 회사원이 되었고 고은은 해외살이를 끝마치고 귀국한 상태다. 이들은 후배들이 제안한 바람밴드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자며 합심하지만 풍세는 끝내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비 내리는 겨레의 기일, 고은은 혹시나 풍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납골당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의 유학길 이후로 잠적해 버린 풍세를 겨레의 유골 앞에서 마주한다. 긴 세월 끝에 옛 연인 앞에 선 고은은 빗속에서 그를 원망하며 노래한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우리었다면, 지난 긴 세월동안 그리워하진 않았을 거야.
한번쯤 다시 생각해 기다리겠어.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옛모습으로.
그러나 어느새 그대는 나를 잊었고, 내가 다가갈수록 그대는 멀어져갔네.”
-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옛모습
고대하던 콘서트 당일에도 풍세는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남은 4명의 멤버들은 풍세의 자리를 비워둔 채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공연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무대 위로 풍세가 등장한다. 친구를 잃은 충격에 연인을 향한 사랑도, 음악을 향한 사랑도 접은 채 긴 시간을 아픔 속에 흘려보낸 풍세는 지난 상처를 딛고 일어서듯 다시 한 번 목청을 높여 노래하기 시작한다.
김광석의 풍성한 음악 세계, 그리고 당시의 추억을 되살려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계속 마음 한 켠에 머물렀다. 특히나 풍세 역을 맡은 배우 김소년의 감정선과 가창력은 김광석의 작품성을 표현하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었다. 배우들은 커튼콜 이후에도 앵콜 3곡을 연달아 부르며 관객석을 아련한 추억으로 다시금 물들였다. 공연장 지하의 무대는 2024년의 가을이 아니라 1994년 봄날의 캠퍼스였고, 그 가운데 그의 음악은 다시 살아나 관객들과 호흡하는 듯 생생했다.
무엇이든 과거가 되면 아름답다. 하지만 유독 찬란했던 옛시절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련했던 그때의 낭만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번 공연은 당시를 경험한 적 없는 나의 마음에도 여운을 남겼다. ‘가객’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김광석의 가사들은 한 편 한 편의 시들로, 그의 생을 담은 작품으로 남았다. 그렇게 완성된 그의 음악세계는 극중의 20년을 아우르고도 남을 만큼 풍요로웠다. 청년의 시기에 짧은 삶을 마감한 그의 음악은 영원한 청춘으로 남았지만, 그의 가사 속에는 비단 청년 세대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정서를 꿰뚫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까.
[유수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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