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모순과 원류 -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정해진 결말
글 입력 2024.10.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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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원본의 아우라에 대해 늘 환상과 호기심을 가진다. 그 호기심은 계속해서 한 분야를 파고 드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환상을 충족하기 위해 단조로운 일상에 단기 혹은 중장기 목표가 세워지기도 한다. 유명한 명화를 실제로 보기 위해 해외 미술관을 방문할 여행 경비를 마련한다던지, 국내 라이센스 버전으로 본 공연의 오리지널 버전을 보기 위해 그 나라에 갈 계획을 세우는 것 등이 그렇다.


원본, 원작, 원전, 원류에 가까운 무언가에 대한 열망은 흐름을 타고 강화된다. 어쩌면 내가 연극을 보다가 뮤지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뮤지컬을 보다 보니 오페라도 경험해 보고 싶어진 것처럼. 그렇게 결국 국내 창작 오페라를 감상한 후 고전 오페라를 궁금해 하게 된 것처럼. 오페라 <투란도트>의 내한공연 소식을 접하고 이 공연을 보기로 결정한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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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2일부터 19일까지 KSPO DOME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투란도트>는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인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이 100년만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내한 공연이다. 올해로 한국과 이탈리아의 수교 140년이 되니 이 같은 문화 교류가 더욱 뜻깊다.


이번 공연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개막 오페라 투란도트를 한국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천재 연출가인 프랑코 제피렐리의 손을 거친 <투란도트>를 소도구까지 고스란히 가져 와 국내 무대에 올렸다.


긴 시간 사랑받아 온 오페라 <투란도트>는 사실 푸치니의 죽음으로 인한 미완작이다. 그가 작곡한 부분은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류‘의 죽음까지이다. 이후 푸치니의 후배가 푸치니의 의도에 맞게 작품을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완성된 오페라 <투란도트>는 1926년 초연을 올렸다.


오페라 <투란도트>의 본격적인 줄거리로 넘어가기에 앞서, <투란도트>에 깔려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본래 ‘투란’은 중앙아시아의 지역 이름이고 ‘도트’는 딸이라는 뜻의 단어로, ‘투란도트’는 ‘투란의 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오페라 <투란도트>의 배경은 가상의 중국 베이징이다. 사실 투란도트 이야기의 기원은 아랍 문학 <천일일화>에 들어 있는 동화였다. <천일일화>는 결혼을 피하려 하는 공주에게 유모가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 중 하나가 결혼을 거부하는 공주와 그녀에게 청혼하는 왕자가 등장하는 투란도트 이야기이다. 이 동화를 바탕으로 18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가 희곡을 썼고,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쉴러는 고치의 희곡을 각색해 또 다른 <투란도트>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쉴러의 <투란도트>를 읽고 푸치니가 이 강렬한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가 시대와 지역을 옮겨 퍼진 데다 번안이 거듭되며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름을 가진 투란도트는 어느덧 중국의 황녀로 변모해버린 형국이다. 자신들에게 먼 나라라 하여 여러 문화와 국경을 무신경하게 뭉뚱그리는 오리엔탈리즘이 짙은 작품이라는 비판은 여전히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중국 역사 문화와 정치 형태에 대한 이해도와 고증 정도 역시 빈약한 편으로, 동북아 문화권에 살고 있거나 이 문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아무리 가상의 중국이라 해도 황제보다 강력한 황녀를 보며 그간 쌓인 역사적 상식의 감각과 극에 대한 몰입이 자주 상충하는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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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피하려 했던 공주가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고, 그런 공주에게 구혼하는 왕자가 답을 맞춰야한다는 기본 골자는 같지만 푸치니는 극의 후반부에서 자기만의 색을 더한다. 푸치니는 목숨을 건 수수께끼라는 혼인 도피책이 무력해진 투란도트가 여전히 결혼을 거부하자 역으로 공주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칼라프 왕자의 이야기를 추가한다. 칼라프 왕자는 날이 밝기 전에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낸다면 기꺼이 공주에게 목숨을 내놓을 것이며, 공주가 자기 이름을 알아내는 데에 실패한다면 자신과 혼인을 하자고 내기를 건다. 이미 수수께끼 명목 아래 수많은 구혼자의 목을 쳤기에 칼라프 왕자가 답을 다 맞춘 이상 결혼을 거부할 명분이 약한 그녀였다. 칼라프 왕자는 공주의 마음을 얻고 싶었기에 공주가 결심을 유예할 시간을 준 것이다. 물론 칼라프나 중국 황궁의 사람들, 백성들이 공주에게 바라며 압박하는 바는 공주가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목숨을 한 번 더 걸어서라도 공주에게 단념할 시간을 마련해 준 칼라프 왕자의 행동은 다소 오만한 여유일까, 아니면 공주도 자신처럼 결혼에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려는 진심 어린 구애일까? 무모해 보이는 칼라프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다. 몰락한 왕조의 왕자로 먼 중국 땅까지 도망쳐 온 칼라프는 공주와 공주가 부리는 사람들이 자신 같은 이방인의 이름을 알 길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칼라프 왕자의 의도가 순수했건 아니건 간에 푸치니가 새로 만들어 넣은 ‘왕자의 이름 알아내기’ 소재는 극의 후반부 줄거리와 칼라프 왕자의 캐릭터성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극의 다채로움 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먼 타국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극의 초반부에서 칼라프는 축출된 왕인 아버지 티무르와 그런 티무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온 노예 류를 베이징의 군중 속에서 만난 바 있다. 노예 출신인 류는 과거 칼라프 왕자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한 조각 친절에 감읍하여 그를 사모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구걸도 마다하지 않았다. 투란도트 공주의 수족은 티무르와 류를 잡아 오고, 류는 칼라프가 원하는 미래를 이뤄주기 위해 고문 당하기를 자처한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자신 뿐이니 자신에게서 답을 구해보라는 도발 같은 절규. 칼라프는 기억도 못 할 순간에 평생을 빚 진 사람처럼 구는 류의 행동이 관객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결국 모진 고문을 더 버틸 수 없어진 류는 자신이 왕자의 이름을 말할 수 없도록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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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전개는 현대인으로서 보기 괴로운 감이 없지 않았다. 공주와 자신의 알력 다툼 속에서 류의 선한 영혼이 희생된 것에 분노하고 상처 입은 칼라프는 투란도트 공주에게 자기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공주를 붙잡고는 분노인지 소유욕인지 사랑인지 모를 입맞춤을 억지로 한다. 이야기를 이미 지정된 방향-공주와 왕자의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진행시키기 위함이지만 이렇게 이름을 알려줄 거면 류는 왜 죽었는지 그 죽음에 대한 회의가 하나도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투란도트 공주 역시 류의 자결 이후 기세가 한풀 꺾인 눈치로, 칼라프의 이름을 알고 나서 오히려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다.


투란도트 공주에게 수많은 구혼자의 죽음보다 류의 죽음이 훨씬 더 큰 동요로 다가온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류의 죽음에서 자신이 남자와의 결혼을 극도로 기피하게 된 원인이었던, 조상 중 한 명인 로우린 공주의 죽음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중국을 침략해 온 이민족 남자들에게 욕을 당했던 로우린 공주는 투란도트에게 외부의 폭력과 모욕에 스러진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을 상징했을 터이다. 그런 로우린 공주의 이름으로 결혼을 거부했던 투란도트였기에 어쩌면 류의 죽음이 자신의 균형 있던 분노에마저 균열을 내는 내상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을까. 혼인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신을 억지로 혼인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사내들, 그래서 로우린 공주를 욕보였던 이민족 사내들을 연상시키는 구혼자들 외에, 류라는 선한 생명이 자신이 명한 폭력의 영향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어쩌면 투란도트 공주는 폭력-폭력의 종류가 다르더라도-에 대한 자신의 모순적인 태도를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1926년에 <투란도트>의 초연을 올린 푸치니가 투란도트의 이런 심리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왠지 오페라 <투란도트> 속의 공주의 무의식 속에는 이런 모순을 자각함에 따른 자포자기함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는 평생 미천하게 취급 받았을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다고 자부하는 황녀조차 신분의 고하를 떠나 한 인간의 죽음 자체를 목격하게 했다. 순수한 영혼의 절명을 목격한 그 순간이 그녀가 선조의 이름과 원한으로 ‘정당하게’ 지켜 온 분노의 연쇄에 미약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정지음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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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공주의 명분과 의지가 상실되어 맺히는, 이 극의 행복한 결말이라는 과실은 과연 누구의 손에 떨어지는가. 마침내 투란도트와 결혼하게 된 칼라프 왕자? 황제의 말도 듣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공주를 이제 정치에서 배제하기 더 쉬워질 가상의 중국 황제? 아니, 결국 이 해피엔딩의 과실은 작품이 만들어질 당시 통용되던 ‘정상 결혼 이데올로기’를 굳게 믿어 투란도트 공주의 굴복이 자신들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주기를 바랐던 세인들의 손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극 안에서 접한 이런 노랫말이 떠오른다. 칼라프가 수수께끼를 다 풀어버려 이제 결혼해야만 하는 공주를 더러 ‘투란도트도 끝났구나’ 라고 하던, 지나가는 말이지만 분명히 극 안에 존재했던 말. 냉혹한 공주도 마음을 열면 사랑을 알 것이라더니 투란도트의 고집도 아니고 투란도트가 끝났다는 표현이 나와 얼마나 놀랐던지. 그리고 그 말을 모두 안 한 척이라도 하듯 다시 극은 공주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을 축하하고 있었다. 극의 결말에서 나는 여주인공의 단념과 패배가 세상을 기쁘게 하는 사랑이 되는 기이한 과거를 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투란도트의 마지막 대사이자 이 공연의 마지막 대사다. 어쩌면 이 결말은 익어야 떨어지는 과실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회가 던진 그대로 돌아오는 공이었을지도 모르지.


극의 도입부인 베이징의 군중 장면에서 군중 역할 무용수 두 명의 안무에 브레이킹 자세가 들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변형을 보고 큰 줄거리는 변경하지 않더라도 지금 보기에 특정 대상에게 지나치게  멸시가 가득한 가사는 조금 수정할 수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 음악성이 강한 것이 특징인 오페라이다 보니 음악과 노랫말은 제일 손대기가 어려운 영역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연이어 들었다. 원전을 살린, 원류에 가까운 작품을 보고자 이 공연장에 들어온 것이 맞고, 이 극이 만들어진 시기 역시 알고 왔지만 나는 어느새 모순적인 마음이 되어 투란도트를 재해석한 극작가는 없는지 갈구하게 되었다. 3막에서는 나와 같은 시간대를 사는 여성 작가의 글이 너무나 읽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요 가운데 여린 듯하지만 관객들의 마음에 하얀 비둘기가 되어 정확하게 날아들던 류의 애절한 고음, 오매불망 등장만을 기다렸던 투란도트의 카리스마와 묘하게 중후한 매력이 있던 목소리, 그리고 칼라프의 ‘모두 잠들지 말라’ 열창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공연을 다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투란도트 공주와 칼라프 왕자의 혼인 직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모종의 정치적 거래가 담긴 대화를 상상했다. 어쩌면 공주는 망국의 왕자에 이방인이라 중국에서 권력 기반이 아예 없는 데다, 공주가 완강한 태도를 보이면 대중의 앞에서 공주에게 주도권을 반쯤 넘기는 듯한 행위를 취할 줄 아는 칼라프라는 남자를 부군으로 맞아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멀고 먼 타국에까지 도망 왔으나 여전히 고국의 적을 경계해야 하는 축출된 왕자는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내기를 해서라도 투란도트가 가진 권력의 비호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공연 내내 든 오페라 <투란도트>에 대한 나의 모순적인 감상들의 무게 추를 맞춰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취향과 가치관이 과거의 작품들과 지금의 작품들 사이를 어느 정도 거리감으로 부유하고 있는지를 가늠해 보기도 했다. 이제 마무리 지으려는 이 글 역시 그런 과정 중의 일부인 셈이다. 투명한 결말에 가닿기보다는 복잡한 감정들에서 비롯되는 여러 생각들을 포착해 두는 글.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하더라도 이 또한 한 편의 존재감을 가지지 않는가 생각하며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관한 글을 맺어본다.



* 김소원, <아레나 디 베로나 '투란도트' 톺아보기 ②>를 참조.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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