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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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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 인상 깊은 디자인 강의를 들은 적 있었다. 강연자는 시장에 어지러져 있는 의자나 어색하게 엎어져 있는 봉투 같은 사진들을 여러 장 보여주고는, 우리에게 무엇처럼 보이느냐 했다. 걸레의 갈래갈래 찢긴 실오라기는 머리카락을 연상하게 하고, 세 개의 뚫린 구멍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런 대답을 듣자, 교수님은 사람들은 종종 사물을 '사람 같은 것'으로 연상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물건들이 단순한 객관적 물체가 아니라 복제된 인간의 팔, 다리, 눈, 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경험'의 근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유사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알 수도 없는 새에,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거대한 감정들이 아주 복잡한 비유와 상징화의 과정을 거친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 도구들과 상호작용 하지만, 우리 정신의 어떤 면은 구두의 살을 물어뜯고, 책의 배에 눈물을 비벼 닦는다. 인간이 아닌 사물과 함께 교류하는 것은 진짜가 아니지만, 진짜와 흡사하다. 아이가 양육자의 빈자리를 장난감으로 채워넣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느꼈던 인상 깊은 기억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 기억과 연결된 다른 기억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강연자는 어느 날 잡담처럼 최근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백인의 지능이 선천적으로 흑인보다 뛰어나다고 이야기했다. 까칠하고 예민했지만, 그의 예리한 감성을 남몰래 흠모했던 나에게 그것은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건을 떠나 끔찍한 자조처럼 느껴졌다.

 

그 말을 하는 강연자는 동양인이었고, 최소한 20살 학생 하나 정도를 깊게 감동을 줄 만한 지적 에너지가 있었지만 아주 유명하지는 않았다. 그 말의 표적이 되는 것은 흑인이었지만, 백인이 아닌 그에게도 올가미로 작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강연 내내 그에게서 느껴진 자유로운 사고의 역동은 정체도 알 수 없는 과학이론이라는 이름 아래에 차단되고, 확실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호하고 위태로운 자리에 자신을 놓았다.

 

그것이 당시 나의 투사된 감정 때문이었는지, 그의 감정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인 자기애적 좌절을 느끼고, 그 좌절에서 압도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보호할 '과학적 사실'과 연결해야 했다면 어떨까? 나아가서 그를 배우기 위해 모인 어린 아이들에게 반정도 농담인 것처럼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누군가에게는 분노로 이어졌을 그 말이, 내가 그에게 가졌던 작은 호감과 만나면서 어떤 슬픔으로 변형되었다. 상상적 존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인간, 그리고 그 압도적인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훼손시켜야 하는 인간의 삶. 결과적으로 이런 것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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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할 책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를 읽으면서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책의 이름만 보았을 때는 그들의 삶에 관한 종단적 연구에 대한 책이라고 추측하겠지만, 책은 당시 여성 잡지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묘사되는지에 초점을 둔다.

 

내가 앞서 말한 '실제 존재'가 아니라 '상상적 존재'와 상호교류하는 인간에 대해 떠올렸던 것처럼, 책 역시 실제 당시 신시대를 맞이한 여성들의 실제 삶을 다루는 대신 그들이 어떻게 대중 매체 속에서 재현되었는지 초점을 둔다. 이렇게 끊임없이 정교화되고 구체화 되는 신여성은 단순한 상상계에 머무르지 않고-때로는 실제 여성의 삶을 근거로 살을 불려 가며- 실제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책은 1920~40년대 발간된 여성잡지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장은 '모던걸'이라는 '아이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기술한다. 흰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 단발머리와 굽 높은 구두는 신문물의 상징과 여성의 섹슈얼리티(그런 여자들은 결사반대라는 남성 필자의 글이 돋보인다.)와 결합하여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2장은 그렇게 상징화된 신여성들을 '객관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추적했다는 은파리들의 제보로 구체화 시키는 대중 매체의 시선에 대해 다룬다. 상징화된 신여성은 때로는 웃음거리로, 때로는 계몽의 대상으로써 대다수는 남성진의 필진에 의해 사전과 어록으로 폭력적으로 규정하였다.

 

3장에서는 흥미롭게도 '신여성'은 다시 '여학생'으로 구분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은 신여성인 것처럼 꾸미고 다니는 기생이나 사치스러운 소비를 즐기지 않는 순수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보호와 규제되어야 할 존재였다. 부족한 학교의 수, 만연한 차별에 의해 이들은 여전히 사회로 진출하지 못하고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4장에서는 대중문화의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의 이야기를 기술한다. 개인적으로는 주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는데,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 여전히 여성 소비자들이 압도적인 지분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대 사회적, 신체적, 심리적 압박으로 괴로워했던 여성들에게 사회는 약간의 취미의 자유를 허락했다. 책은 자본주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 하더라도, 문화 예술 속에서 여성들은 욕망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5장은 전통적이고 강압적인 혼인의 시대의 과도기에 있었던 자유연애를 꿈꿨던 여성들을 비춘다. 여성 잡지는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고 부모가 아닌 자신이 주도하는 결혼을 해야 할 것을 강조하지만, 당대 젊은이는 이미 집안에서 정해준 여성 배우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자유로운 연애는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제2 부인들은 자신의 욕망 주체로서의 개인과 가부장적 권력의 상징인 정조 사이에 결박된 존재로서, 가십거리나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6장과 7장은 개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오는 장이었다. 과학과 사회과학 지식의 유입, 적극적으로 현실 세계에서 활용되는 사회주의적 세계관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에도 열렬히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대 묘사하고 있는 과거나 지금이나 사회는 가정의 일을 여성에게 전담시켜 아무런 보수도 지급하지 않게 하여 사회의 전체적인 비용을 줄이고, 거의 신화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현모'라는 상징을 내세워 여성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글을 쓴 여성 필진의 글은 1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각 챕터는 잡지 자료에서 자료를 추적해나가면서 마무리 장에서 '모던걸', '여직원', '여학생', '어머니'로 끝없이 변형되고 갈라지는 '신여성'이라는 상징 앞에서 실제 여성의 삶이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를 간략하게 분석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마무리 장이 특별히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이 책을 읽는 현대 여성들에게 어떤 희망을 남겨준다는 점에 있다.

 

내게는 저자들이 계속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여성은 관음적이고 모욕적인 시선 속에서 '스위트 홈'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어떤 여성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피해자였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우리에게 잘 들려오지 않고, 그들 자신도 잘 인식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조금씩 사회를 성장시키고 사회를 변화시켰다. 오늘날 존재하는 여성 중 일부가 자신의 의지와 반하는 방식으로 '스위트홈'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생물학과 선천성을 위시하는 일부 과학자와 안티페미니스트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이(이런 것들은 수많은 역사적, 과학적 증거들이 수없이 반론을 제기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것은 쌓이기만 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사회적인 것은 나아질 수 있다. 100년 전에도 존재했던 강렬한 목소리와 같이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그때의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기억해줄 것이다. 나는 저자들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텍스트를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의무이자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무척 단순한 의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사와 예술이 증언하듯이, 인간은 늘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온몸으로 몸부림쳐왔다. 오래전 치욕스러운 차별을 겪었던 여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남성으로 태어나지 못한 삶에 시를 태워버린 이도, 워더링 하이츠에서 분열된 삶을 꿰매지 못한 자들을 거칠게 상상한 이도 여자였다. 오늘날 등장하는 용감하고 날카로운 저작들의 주인공도 여자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여자들의 흔적들이 오랜 시간 속에서 지금의 나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나의 무관심이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찾고 발굴해내야 할 주제들은 개인의 무능함이 아니라, 사회의 무관심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분명히 존재했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날 안티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비웃는 것처럼, '여성적 나약함'으로 인해 가정으로 도망간 걸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야 나는 어머니에게 분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어머니는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우아한 세례명으로 다른 집 부인들과 사교했다. 어머니는 늘 자기 일이 좋다고 하셨지만, 자신에게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때로는 거칠게 화를 냈다.

 

하지만 언제나 늘 좋은 아내로 돌아와 자신의 진심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싸우는 날에만 표출되었던 가정주부로서의 비굴함과 치욕스러움은 사랑으로만 둘러싸인 어머니를 의심하게 하였다. 내게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한편,전업주부만은 되지 말라고 했던 어머니는, 나에게 정말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안겨주었다.

 

어머니가 가정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만물박사와 같은 어머니의 지적 능력에 순수하게 기뻐하지도 못했고,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에 모든 궂은 일을 당연한 일로 표현하니 어머니의 부지런함을 아버지와 달리 온전하게 존경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것이었지만, '경제력' 앞에서 그녀가 가진 모든 인간적인 축복이 아주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들이 존재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이 맞서 싸우지 않고, 어쨌든 사랑과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편, 아주 깊은 속에서 분노하고 있었다.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피해자를 욕하는 태도 따위가 아니다. 나를 낳은 우주 전체가 분노하고 반항하지 못한다면 나도 기꺼이 그럴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는 그래서 이상한 위안을 주었다. 당시에 존재했던 욕망의 주체, 피해자, 반항아, 합의했던 수많은 여자를 기꺼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면서, 나의 어머니 안에도 수많은 여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이제 이전의 여성들, 무엇보다 나의 어머니를 동정하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들 안에도 수많은 모습이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지금의 나는 수많은 여성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다음의 여성들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에게 인상 깊은 경험을 주었던 강연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 상상의 일부분을 소외시킨다. 우리가 늘 착각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상상적 존재마저 결국은 궁극적으로 자신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인종이나 성별을 이유로 상징화된 존재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한다. 그 차별적 대상이 되는 것은 몹시 불쾌하고 현실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게 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을 제한해야 했던 그들의 나약함에 분노하고 동정해야 한다. 차별하는 자와 차별당하는 자 모두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늘 마음 한구석에 간직할 수 있다면 분노와 사랑은 언제나 함께 공존할 수 있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고집스럽게 여성주의와 관련된 책을 읽는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의 분노가 옅어지는 것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나는 정말로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자기가 말했던 대로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도 비슷하게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말해야 했던 자기 자신과 그녀들의 복잡한 감정을 좀 더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비켜봐 달라고. 그런 방식으로 그 많던 신 여성들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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