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요 - 우라미치 선생님 [드라마/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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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이십 대 중반이 되면 더할 나위 없는 멋있는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금전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사랑하는 연인도 있으며,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갖춘 그런 어른으로 성장해 있을 줄 알았다.
이십 대 중반을 겪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안다. 이 나이가 얼마나 부족함이 넘치는 시기인지. 중고등학생이던 시절, 좋은 대학에만 가면 인생이 끝! 곧바로 준비된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스무 살이라는 큰 장벽이 허물어짐과 동시에 비로소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인이 되면 우리의 인생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선택이다. 방학에 무엇을 할지, 전공을 따라 취업할지, 학문의 길을 이어갈지, 아니면 아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지조차 개인의 온전한 선택에 달린다. 그리고 이 선택은 끊임없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 위에 놓인다. 성인이라는 자유에는 선택이 요구된다. 하나의 선택지를 고름으로써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는 도전장이 생기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인지 재고 따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지쳐갔다. 꿈꾸던 어른의 모습과 점점 멀어져 간다고 느꼈다. 그런 순간이 다가올 때면 애니메이션 「우라미치 선생님」을 즐겨봤다. 이런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떠안은 아이들은 더 이상 하기 싫다고 울거나 피할 수 없다. 나는 어른이라는 불확실한 자격이 내면의 성숙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현실이 고되더라도, 금전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압박되는 상황이 찾아와도, 내키지 않거나 귀찮은 일이더라도 자신의 결정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정의이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인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들의 내면에 집중하는 애니메이션 「우라미치 선생님」을 소개한다.
선생님들도 사람이기는 마찬가지
「우라미치 선생님」은 일본 만화 “우라미치 선생님”을 원작으로 하는 TV 애니메이션이다. 테레비 도쿄에서 방영된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마망과 투게더]의 체조 선생님인 "오모타 우라미치"와 주변인의 일상을 담은 블랙 코미디이다.
밝고 쾌활해 보이는 방송용 캐릭터 뒤에 위치한 그들의 본모습에 주목하는 것이 특징으로, 직장인의 대비되는 얼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들은 노련한 아동 교육 프로그램의 MC이지만 때때로 아이들에게 현실의 고달픔이나 사회생활의 서러움을 토로하기도 하며, 민망한 컨셉을 소화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듣고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시선에서는 늘 완벽해 보이는 선생님이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주인공인 체조 선생님 “우라미치”는 담배 없이는 살지 못하는 애연가이다. 매화마다 방송 녹화를 마치고 흡연하는 장면이 나오며, 수면제나 독한 술 없이는 잠에 들지 못하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가졌다.
토끼 탈을 쓰고 토돌이 역할을 맡은 "우사하라"는 이성 관계가 가볍고 방정맞다. 금전적 가치관도 좋지 않아 월급을 파친코에서 모조리 쓰기 일쑤고, 심지어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는 광경도 심심찮게 보인다.
곰돌이 탈을 쓰고 곰돌이 역할을 맡은 "쿠마타니"는 갑질하던 상사를 두들겨 패 예전 직장에서 해고됐다. 그는 실력이 출중해 출세가 보장되었지만, 상사의 부당한 행동에 분노하여 두 번이나 폭행한 전적이 있다.
그 밖에도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느 한 면이 결핍된 모습을 보이며 불완전하게 존재한다. 그들은 각자의 사정과 상황에 의해 이곳 ‘마망과 투게더’로 흘러오게 되었다. 꿈과 희망을 찾아다니기보단 내일의 출근 시간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어른들이지만, 그렇기에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부족한 부분을 말없이 메꿔간다.
시키면 해야 하는 직장인의 운명
우라미치는 카메라 앞에서 어린이들을 진두지휘하고 올바른 행동 교육에 앞장서는 존경받는 선생님이다. 그러나 그도 직장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카메라가 꺼지면 연출 감독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회식에 억지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들은 방송인이라는 특수한 직업 탓에 정해진 유니폼 외에도 다양한 의복을 착용하는데, 테마의 컨셉에 따라 다소 민망하거나 불편한 복장을 소화해야 할 때도 있다.
애니메이션 7화에서 마망과 투게더의 연출가는 조미료라는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는다. 그리고 "차조기*의 신"이라는 컨셉으로 맨살이 훤히 보이는 망사옷을 우라미치에게 입힌다. 옷이 왜 그러냐며 묻는 아이들에게 우라미치는 "꼴이 왜 이런지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신은 여기 있을 수 없다"며 차분하게 대답한다.
체념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의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라미치에게 일상이다. 그 밖에도 상부는 연휴를 대체한 회사 야유회 참석을 강요하거나, 계획에 없는 연장 근무를 요구하는 등 무리한 주문을 한다. 그럴 때마다 [마망과 투게더]의 선생님들은 인중을 좁히는 분노와 주먹에 차오르는 부아를 애써 감춘 채 회사의 요구에 응한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차조기: 꿀풀과의 한해살이 풀로 깻잎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시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꿈이란 말이지
애니메이션 11화에서 아이들은 우라미치에게 “만약에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별생각 없이 던진 의문일지도 모르는 말에 우라미치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을 한다.
원래 꿈이라는 건 품고 있으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겁게 느껴져. 꿈을 간직해서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는 사람도 있고 포기해야 편하게 나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친구들이 지금 가진 꿈은 계속 품고 있어도 좋고 어딘가에 놓고 가도 괜찮아.
어쩌면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냉소적일 수도 있는 답변이다. 밝은 미래만을 꿈꿔왔던 어린이에게 어른의 줏대로 현실감각을 내세웠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라미치는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고 싶어 한다.
사실 우라미치는 전직 체조 선수 출신으로, 전국 남자 체조 경기 대회에서 1위를 할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체조에 대한 열망은 본인의 의지라기보단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는 훈련에 있어 아버지의 강압적인 모습에 트라우마가 생겼으며,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 여동생이 가출한 적도 있다고 언급한다.
현재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에서 체조 선생님을 맡은 그의 모습은 체조 선수였던 과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삶의 낙이 없어 보이는 무료한 일상의 반복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망과 투게더를 진행하며 아이들로부터 힘을 얻는다.
순수한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 우울감으로 무뎌져 있던 표정이 한순간에 밝아진다. 그는 현실에 찌들고 지쳐 있다가도 무대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감정이 풍부해진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대가 없는 사랑을 선사하는 아이들과 마주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방송을 좋아하는 애들을 위해서라면 힘낼 수 있어. 애들의 웃는 얼굴을 보면 통증도 잊게 되거든.”
끝맺으며
내가 마망과 투게더에 나오는 아이들만 했을 무렵.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방영하는 [모여라 딩동댕]이라는 어린이 뮤지컬 프로그램을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인형 탈을 쓰거나 분장을 한 등장인물들의 연극으로 구성되었다.
방송의 클라이막스는 번개맨이 맡았다. 번쩍거리는 번개 효과음과 함께 등장한 파란색 쫄쫄이를 입은 남성은 번개 파워!를 외쳤고, 객석에 앉은 어린이들은 혹시라도 악당에게 패배할까 손에 땀을 쥐고 집중했다. 권선징악의 유구한 구조를 띠고 있는 프로그램은 늘 번개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해악을 무찌를 것만 같은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냈다. 아침밥도 마다한 채 텔레비전에 푹 빠져있던 나는 어른이 되면 번개맨처럼 모든 것에 자신감이 넘치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번개맨도 끊임없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충을 겪었을지 궁금하다. 평범한 사회인에 불과했을 번개맨도 매일 아침 출근하기 싫은 몸뚱아리를 침대에서 억지로 끌어냈을까. 좀 더 임팩트 있게 악당을 물리쳐 보라는 상사의 지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까.
이제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보니 알겠다. 어른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얼떨결에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자신을 감싸는 포장지를 그럴듯하게 꾸미고 리본을 묶어 포장한다. 그렇게 사회로 나갈 준비를 마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뿐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단순 명료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마친다. 내가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지 헷갈릴 때는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어른이라는 게 사실은 별거 아니라고. 큰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불완전하게 존재해도 어른이라고.
[조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우라미치 선생님은 저도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이어서 제목부터 너무 반갑고 즐거웠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코끝이 찡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