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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랜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원더랜드>를 보고 왔다. 묘한 영화였다. ‘좋을 수 있었는데, 그런데 …’라는 미지근한 감상이 남는.
근래 즐겁게 읽었던 몇몇 한국 SF 소설이 생각이 났다. 약간의 상상력으로 변주를 준 낯선 삶의 조건에서 살아가는 인물을 담담하게 서술하며 오히려 현실의, 더 구체적으로는 근래 한국에서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이 말랑하게 가슴을 건들며 문학이 이렇게 좋은 거야, 가르쳐줬다.
이야기에 감명받은 사람이 많아서 널리 회자된다는 게 좋았다. 허구를 경유해서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고, 그건 (이렇게 표현하니 조금 쑥스럽지만) 꽤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을뿐더러 주로 사회과학서, 철학서 위주로 편식하던 내게 문학에 대한 취향이 약간이나마 생겨난 계기였다.
그렇게 좋았던 이야기들이 연상되었다면 영화 또한 좋았다는 게 아닌가? 누군가 묻는다면, 사실 그래서 오히려 아쉬움이 더 크게 남았다. 이 영화는 상상을 충분히 밀고 나가지 못해서 허구가 현실까지 미처 도달하질 못했다. 두 영역이 맞닿았다면 그 감각은 분명 기꺼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현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생각을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허구가 실재를 재구성하는 경험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법 같은 사건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에 남았다.
어떤 상상이 더 필요했을까?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소재는 상실과 인공 지능(AI)이다.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의 외양과 목소리, 말과 행동, 그리고 어쩌면 의식까지 인공 지능을 통해 가상 현실에 재현해 주는 서비스이다.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원더랜드를 통해 저 멀리 어딘가에 살아 숨 쉬는 소중한 이와 영상 통화를 하는 것과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원더랜드를 이용하면서 벌어지는 두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가지 이야기의 주체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원더랜드를 이용해 어린 딸에게 제 죽음을 숨기기로 하고 가상 현실에 인공지능으로 재현된 존재(탕웨이)이다. 다른 이야기의 주체는 혼수상태를 헤매는 애인(박보검)을, 원더랜드를 통해 재현하여 일상을 이어가다가 그가 의식을 회복하자 혼란에 빠지는 인물(수지)이다.
변주된 영화 속 삶의 조건은 자연스레 관객에게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재현된 존재는 실제의 그럴듯한 모사인가? 아니면 생전의 인물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자의식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 영화는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답을 유추하게 되는데, 문제는 영화의 두 가지 큰 줄기인 모녀의 이야기와 연인의 이야기에서 상반된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녀의 이야기에서 재현된 존재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선 안 되며, 가상 현실의 모순된 지점을 눈치채선 안 되는, 섬세한 상호작용이 요구되는 상당한 수준의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이 존재는 심지어 입력된 적 없는 과거의 기억을 꿈처럼 떠올리고,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설계된 가상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 현실 세계와 맞닿은 영역까지 탈주하기까지 하며,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에 개입한다. 여기서 재현된 존재는 신체가 없을 뿐 인간에 준하는, 심지어 생전의 인물과 연속성까지 띠는 자의식과 행동 능력을 갖췄다.
반면 연인의 이야기에서 재현된 존재는 유능하고 소중한 사람을 잘 흉내 내기까지 하는 인공지능 비서처럼 행동한다. 딱 알맞은 시간에 전화벨 소리로 잠을 깨워주고,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하고, 놓고 가는 게 없도록 챙겨주는 것이 재현된 애인이 처음으로 제시되는 모습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욕망이 없어 보인다. 연인 관계 속에 재현되었음에도 그는 애인의 다른 남자와의 영화 데이트를 흔쾌히 허락하고, 갑자기 연락을 피해도 분노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원본과 마주했을 때도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는다. 여기서 재현된 존재는 그저 서비스 이용자를 더 충실하게 보필하고, 감정적인 안정까지 제공하는 프리미엄 인공지능 비서 서비스 정도로 보인다. 당연히 생전의 인물과 연속성도 띨 수 없다. 모사의 대상은 현실 세계의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으니까.
‘말이 돼?’라는 질문에 몸서리치는 창작자들이 많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분명 개연성, 핍진성에 대한 집착은 창작이 가닿을 수 있는 지평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원더랜드>가 얼버무린 답이 ‘영화적 허용’으로 치부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원더랜드는 어쨌든 삶 이후에도 이어지는 삶,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따뜻한 서비스로 그려진다. 그러나 모녀의 이야기 속과 같은 재현된 존재라면, 그 정도의 인격을 갖춘 지성체를 기만하고 가상 현실 속의 그들의 삶을 서비스 이용자의 의도대로 조정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위일까?
한편 연인의 이야기 속과 같은 재현된 존재라면, 오로지 서비스 이용자의 욕구에 감응하여 원하는 반응을 보여줄 뿐인 인공지능을 이용한 ‘삶 이후의 삶’에 대한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면서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상실의 고통과 필멸의 감각을 덮어 두고 죽음을 없던 일인 것처럼 간단히 ‘취소’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심리적 방어 기제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일이 되진 않을까?
상상이 여기까지 나아갔다면 우리는 인공 지능이 발달시킬 수 있는 의식 수준의 가능성과 수반되는 답해야만 할 철학적 질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인격을 규정하는가?’라는, 오래되었으나 답을 내릴 수 없으며, 그러나 답하는 과정에서 삶의 중요한 가치를 다시 짚어보게 하는 심대한 질문을 다시 마주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필멸과 상실이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야기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마냥 터부시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하여 들여다볼 기회는 자주 오지 않으니, 그건 꽤 귀한 얘깃거리였을 터다.
이 모든 가능성을 내던지고 <원더랜드>는 의문스러운 평온의 색채로 이야기를 봉합했다. ‘원더랜드’는 삶과 완전히 유리된 허황한 허구로 남겨진다. 물론 모든 허구가 현실에 어떤 의미를 생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약에 그랬다면' 어떤 이야기가 됐을까? 아쉬움만이 길게 이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