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그런 일은 쓸모가 없다

글 입력 2024.06.0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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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선물이에요. 겨울 쿨톤 맞죠?

 

벙쪘다. 아니, 이걸 왜 내게. 이걸 왜 당신이 내게.


열기구인지 낙하산인지 하여간 그런 것을 타고 온 사람이었다. 전공도, 원래의 삶도 지금의 자리와는 거리가 하등 멀지만 결국엔 내 옆자리에 앉는 사람. 어쩌면 나보다 이 공간에 더 오래 머물렀다고 여겨질 자리에 앉을지도 모르는.


사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던 곳이었다. 구직 사이트를 뒤지는 동안 입에 풀칠하기 위해 잠시간 앉아 있던 자리였다. 인턴으로서의 3개월. 그 이상은 생각이 없었기에 낙하산의 등장은 남의 집 부부싸움처럼 나와는 무관한 사건 같았다. 문제는, 애초에 심성이 비뚤어진 내가 이런 방식으로 취업하는 사람들을 고깝게 본다는 점이었다.


고용 인원에 비해 순이익이 높아서 그런지 여유가 전혀 없는 회사는 아니었다. 사무실 위치도 무난했고, 사장은 식대 같은 것에 짜게 굴지 않는 호인이었다. 팀장들 간의 기 싸움이 화두가 되는 정도의 분위기와 안정적인 수입. 사업은 임원의 손에 의해 굴러갔기에 업무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수익 구조에 문제가 없도록 자리에 앉아 명패를 걸어놓고, 다소 반복적인 사무 노동을 제공하는 일이 ‘직원’의 주 업무였다. 낙하산 인사가 빈번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만 같은 일. 새로 온다는 사람은 어쩌면 아주 좋은 자리를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큰 어려움 없이 일해도 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그런 자리.


등은 따스워지고 배도 불러 오니 여기 조금 더 오래 있을까 흔들리기도 했는데, 낙하산의 등장은 다시 미래에 대한 열정과 천착에 불을 붙였다. 낙하산 같은 게 존재하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지 않았다. 묘하게 성차별적인 타 팀장의 발언도 그에 가세해 흔들리던 내 심지를 곧추세워주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가만한 지옥에 갇힐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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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떠날 준비가 된 자의 마음으로 있던 곳인 만큼 사장이 그녀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영 좋게 보이지만 않았을 뿐.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조차 들지 않았다. 오는구나. 나는 가는데. 정규직 생각이 있냐는 사장의 며칠 전 질문이 떠올랐다. 내 대답이 의미가 있긴 했을까, 하는 무용한 궁금증만이 일었다. 첫인상도 비슷하게 쓸데없었다. 가을 웜톤 같은데. 쿨톤인가. 묘하게 헷갈리는 인상이었다.


모난 구석이 딱히 없는 사람이었다. 밝고 무해한 사람. 나는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었으므로 서로에게 더욱 무해했다. 퇴사 2주 전까지 결정을 밝히지 않은 채 사람들과 하하호호 재밌게 대화했다. 사실 마냥 재밌지만은 않았다. 여길 나가면 매일 불안할 테니까. 또 수염뿌리 식물처럼 여기저기 손을 걸쳐 놓은 채 끼니를 해결하고 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지원하며, 스트레스에 너무 시달리지 않게 관리도 해야 했다. 버친 삶이 펼쳐질 것이란 말과 같다.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하리만치 불안한 미래를 갖다 버리고 편안한 미래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그렇게 궁금해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정규직 안 해요. 다음 달부터 안 나와요.


동기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나가는 것이냐며 계속 추궁했고, 팀장은 퇴사 전날까지도 기회는 열려 있으니 잘 생각해 보라는 말만 반복했다. 별 대답은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녀는 아쉽다고 말했다. 정말 아쉬우세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가지 말라는 그녀의 말도 웃음으로 넘겼다.


딱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 상황을, 내 속마음을. 퇴사하고 나면 날마다 불안으로 가득하겠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집단에 있고 싶진 않다고. 남들은 애써서 들어가는 자리를 손쉽게 얻어내는, 그저 ‘운이 지지리도 좋은 사람’은 알지 못할 이 막막함을 어떻게 견딜지 잘 모르겠다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거 재밌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죄송하지만 나는 운만 좋은 사람이랑 딱히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아요.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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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대화가 길게 이어진 적은 없었다. 결이라도 맞았으면 소소한 대화라도 길게 했을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니어서 대화들이 전부 토막 났다. 불쾌하지만 유쾌하지도 않았고, 무겁진 않지만 즐겁지도 않았다. 무난한 대화들이었다. 그렇다고 분명하게 떠오르는 대화도 없다.


그래서 많이 놀랐다. 투명한 폴리백 안에는 내가 즐겨 쓰던 브랜드의 틴트와 귀엽게 생긴 헝겊 뭉치가 들어있었다. 놀라는 것도 잠시, 궁금증에 황급히 포장을 뜯으니, 별거 아니고 수면양말이에요, 고양이랑 강아지 발바닥 그려진 거- 귀엽지 않아요?


수족냉증이 있지만 굳이 몸을 데우려 들지 않고 있는 대로 사는 중이었다. 양말을 꺼내 만져보니 정말 보드라웠다. 기분이 좋아지는 감촉이었다. 퇴근 후 자기 전에 신어 보니 따뜻했고, 정말 기분이 좋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양말에서 관심을 거두고 틴트를 꺼냈다. 분홍색의 매트한 재질이었다. 내 스타일에 ‘찰떡’이라는 후기를 많이 보긴 했지만 도전해 보지 않았던 색상이었다. 새로운 화장품에 도전하기 위해 없는 돈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던 시기였다. 겨울 쿨톤 맞죠. 저번에 쓰는 틴트 보니까 저랑 똑같은 거 쓰시더라구요. 여기 쿨톤 립 이쁘다고 유명하잖아요.


양말을 집어 계산하고 틴트를 고르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이나 주먹같이 여린 것 말고 프라이팬이나 망치같이 딱딱한 것으로. 나는 진심으로 마음 쓰지 않은 사람에게 ‘선물’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하는 인물이라 더더욱 놀랐다.


본인이 쓸 틴트를 사고 양말을 사다가 내 것을 하나씩 더 산 것일 수도 있고, 지나가다 노점에서 파는 양말이 눈에 띄어 갑작스레 준비한 선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느 경우든 남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는 행위란 엄청난 일이라는 점이다. 난 그 소중한 걸 받아버린 셈이었다. 어떤 마음이든 쉽사리 무언가를 건네지 못하는 사람인 내게 그 작은 선물더미는 상당히 당황스러웠고, 얼떨떨했고, 고마웠다.


단순히, 서로 심기를 거스르는 면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이도 비슷하고, 관계도 불편한 것 없는 사이라 웃어 보였던 게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떠난다고 선물을 준비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고양이 발바닥이 찍힌 수면양말과 자두색 틴트가 귀엽고 고마워서 뒤통수가 얼얼했다. 한없이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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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미워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꽤 힘이 드는데,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에 꽂혀 굳이 힘들여가며 언짢아했다. 폴리백에 찍힌 진분홍색 하트를 본 순간 깨달았던 듯하다. 사람 미워하는 거, 정말 쓸데없는 짓이구나. 내가 아무리 미워해도 돌아오는 게 전혀 없구나. 그러잖아도 여유 없는 마음을 좀 먹여가며 미워했는데 돌아온 것이라곤 수면양말과 틴트였다. 무용한 데에 기력을 썼고, 유용하고 선한 마음에 고맙고 미안해졌다.


이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해서, 그 이후로는 어떤 삶이든 그 사람이 뛰놀았던 운동장은 차치하고 본다. 선입견으로 인해 생긴 선입견이다. 누르지 않으면 눌리는 관계에서도 살갑게 굴려 애썼는데, 이런 데에 쓰이는 기력은 이상하게 헛되지 않은 것만 같다.


그렇다고, 살면서 마주할 모든 사람들을 좋게만 볼 수는 없으리라. 피해를 주는 사람은 짜증이 날 테고 내 것을 빼앗아 가는 사람에게는 화가 날 테다. 그런 사람들마저 좋게 보자고 할 만큼 성인군자는 못되기에 ‘만인을 사랑하자’ 따위의 성스러운 표어를 되새기며 살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의 세계도 다 다르니까.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까 조금은 너그럽게 살아도 괜찮은 듯하다. 그러면 미간에 주름도 덜 지고 기력을 낭비할 일도 없어서 내게도 좋다. 굳이 힘들여서 미워하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일은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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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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