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진실과 회복'

윤리공동체로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
글 입력 2024.03.3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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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밝힌다. 상처를 받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치료 해법을 나열한, 그러니까 '피해자를 위한 테라피' 책이 아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이 책을 선택한다면 얻어갈 수 있는 게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더욱 포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피해가 발생했을 때 개인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 피해는 오로지 피해당사자의 것인가? 우리가 모두 추구해야 할 정의는 어떤 것이며, 그를 위해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가?


저자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우리'와 '대안'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피해자가 어떠한 사건을 겪은 후 트라우마를 겪는 것은 고립감과 불안전, 그러니까 타격받은 공동체 소속감과 지워낼 수 없는 권력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 위해선 공동체의 지지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이 대항할 수 있다는, 또 당당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지는 갑자기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과 같다. 한 사람의 뒤를 또 다른 사람이,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따르며 큰 물결을 일으키듯, 의지는 동참할수록 강해진다.


"정확히 말해서 복수에 해당하는 조치는 없다. 복수할 수 없을 때만 복수하고 싶고, 복수할 수 없으니까 복수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한심하고 역겨울 뿐이다."


허먼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인용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피해자의 응보적 분노는, 그가 공동체에서 응답받지 못한 채 고립되고 방치되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공동체가 피해자를 지원할 때 비로소 흔히들 생각하는 복수라는 악의의 감정은 타당한 공분으로 바뀌게 되며, 그것이 실제 피해자와 신뢰가 깨진 공동체를 위한 보상의 원동력이 된다.


이 대목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살면서 대단히 범법적인 일에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의 분노가 그저 인격이 훼손된다는 데서 비롯한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인 분노로만 여겨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분노를 공동체, 즉 나 같이 '이런 일이 있다니…. 세상 말세다.' 정도로 잠깐 화내고 잊어버리는 소극적 방관자들이 큰 부분 자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책의 1장이 마치 논문인 듯 역사와 철학을 넘나들며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에서 어떤 통찰을 얻어낼 수 있으리란 기대를 거의 접은 상태였다. 문학이나 조금 깔짝거리는 내겐 너무 어렵게 느껴졌던 탓이다. 비단 나뿐이 아닐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부디 멈추진 않길 바란다. 조금만 차분히, 조금만 더 깊이 있게 주의를 기울이며 읽으면 이 책은 내가 얼마나 많은 무지와 편견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특히 내게 새로운 관점을 주었던 것은 공방 중심의 사법 체계가 어떻게 피해자를 지우며, 깨진 사회적 신뢰를 다시 이어 붙이는데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성범죄가 가부장제의 권력 문제와 미소지니적 시선으로 불기소된다는 사실이 성범죄가 단순히 개인의 악랄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과 윤리공동체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깨닫게 해 주었다. '공동체', 이 책의 키워드는 그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원하고 또 회복을 원한다면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 우리가 모두 함께해야 한다.


"어떤 말로 사죄하느냐보다는 감정이 공유되느냐가 중요하다."


"피고인에게는 범행을 부인할 때보다 인정할 때 유리한 점이 더 있어야 한다. 기존 시스템에서 피고인은 '손댄 적 없다, 손댄 적 없다, 손댄 적 없다.'로 일관하는 것이 유리하다."


허먼의 수십 년간 간 다져진 경험과 지식, 그리고 피해 생존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생각을 과연 해볼 수나 있었을까?


타인의 인정, 감정의 공유,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한 (필요한 경우 사법과 연계되는) 대안적 시스템.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개인의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내야 한다. 피해자가 생기는 그 순간 우리 공동체 역시 똑같이 상처를 얻기 때문이다.


"회복적 정의의 근본 원리가 가해자 처벌하기가 아닌 범죄 피해 바로잡기라고 말한다."


"정의를 구현한다는 말은 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적 보호책을 확보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폭력 피해자의 회복과 생장을 위해 조력한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관점이 허먼이 생각하는 정의다. 이를 책으로부터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란 희망이 보일 것이다. 처벌이 아닌 회복이다. 곪지 않으려면 치료해야 한다.


한편, 읽으면서 조금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조금 순진한 생각 같기도 했다. 윤리공동체라니, 우리가 진정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이며, 가해자는 정말 시선과 말로 교화, 혹은 적어도 움츠러들 수는 있는가. 그러한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뜻깊은 주제와 방안과 통찰을 담은 이 책은 우리에게 갈 길이 너무나 멀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절해선 안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와 같은 전문가들이, 혹은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내재화할 줄 아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세상은 변화할게 분명하니까. 그러니 이 책은 초석이다. 이런 조금은 급진적인 생각들이 주류사회에 당연하게 편입된다고 생각해 보라.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그렇게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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