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회복기

글 입력 2024.03.3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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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처음에는 탭이 늦게 열렸고, 나중에는 열어둔 탭이 꺼졌다. 메모리 부족이니 창을 조금 닫으라면서.

 

창을 몇 번 닫아도 계속해서 꺼지길래 검색을 조금 해 봤다. 친절한 초록창은 노트북 속도 저하 원인은 CPU의 온도라고 말해줬다. 너, 그대로 두면 정말 탈 나겠어.

 

수십 개씩 열어둔 탭을 다 지웠다. 지금은 필요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꼭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믿음. 실체 없음을 알면서도. 그다음은 메모장 크레이프 케이크. 반죽으로 만들고자 한 장씩 읽었다. 예열된 팬에 빠르게 펼치고, 반죽을 끝도 없이 쌓아 올리면서. 커스터드 크림도, 다크 초코 크림도 아님에도 달게 느껴졌니. 그래, 미안해. 다음에는 더 잘할게. 누가 한 말이니.

 

언제부터 무수히 쏟아지기 시작했을까. 하나씩 마주할 자신이 있니. 다루기 어려워 제대로 조각하지 못하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쌓여 있었니. 아까운데, 정말로 아까웠니. 커서가 바삐 움직이는 손을 따라잡지 못했던 시점을 기억하니. 한껏 쌓아놓은 말뭉치를 몇 초 있다가 우수수 쏟아내고 도망치던 그때를. 말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던 시점이.


노트북은 오랫동안 쌓아온 중요 문서까지 전부 토해내고 나서야 제 속도를 찾았다. 여전히 뜨거웠지만. 대부분은 한글이거나 워드였다.

 

중요 문서는 그 이름답게 별 표시로 빼곡했다. 검은 별을 몇 번이고 붙였는지, 이름보다는 별이 먼저 보였다.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목은 의미가 있을까. 사실 이름 붙이는 일 자체가 의미 있다지만, 정말로 별을 붙일 정도로 중요한 문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는 일어설 수 있니. 정말 급하거나 내게 중요한 문서였다면 별을 붙일 새도 없이 당장 읽었을 테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찾으러 가서 계속 기억하려고 애썼겠지. 년도 순으로 구분 지은 폴더 따위에 처박아두고서 하루 종일 노트북을 켜 두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도 살아서는 있었다. 열이 나도 한참을 돌아갔다. 팬소음은 어쩔 수 없어도.

 

노트북의 숨이 턱 끝까지 막히는 시점에 비워냈다. 드디어 CPU가 정상 온도로 돌아왔고, 다 합해서 몇백 개도 안 될 법한 탭부터 대용량 프로그램까지 정리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음에 맥이 빠졌다. 전원을 껐다. 잠 못자고 밤을 지새우던 시간도 끝이 났다.

 

비로소 여유가 생겼다. 막연하게 관심 두던 일부터 사소한 취향에 이르기까지 시작할 여유.

 

새로이 알게 되는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서 돋아나는 봄의 새순이다.

 

 

[이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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