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섬세한 기술로 빚어내는 관계의 예술 - 연극 아트 [공연]

글 입력 2024.02.13 11:3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조명이 꺼지면 어딘가 언짢은 듯한 마크가 자신의 오랜 친구 세르주 이야기를 관객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세르주가 흰 바탕에 흰 줄이 몇 개 그러진 말도 안 되는 그림을 하나 샀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화가인 ‘앙뜨로와’의 그림, 그저 ‘하얀 판때기’ 같은 그 그림을 그토록 ‘애정하는’ 친구 세르주가 자그마치 5억이나 주고 샀다는 말에 마크는 기가 찬다. 하지만 동시에 세르주 역시 자신의 취향대로 구매한 그림에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마크가 반가울 리 없다. 그림 하나에서 시작된 논쟁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다툼으로 번지고 모순적이게도 이 때문에 한동안 특별한 교류가 없던 세 친구 세르주, 마크, 이반은 한 자리에 모인다.

 


아트공연사진.jpg

 

 

세 인물 각각의 긴 독백들은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듣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기 친구에 대한 내용이 대다수이다. 서로가 오랫동안 아낀 친구라고는 하는데, 친구를 신경 써준다며 내뱉는 말들엔 따뜻한 애정보다는 오히려 비난이 묻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진심으로 친구를 미워한다기엔 100분이나 되는 러닝타임 동안 그토록 집요하게 똑같은 지점에 멈춰 서서 서로를 세심하게 뜯어보며 싸울 일인가 싶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의 줄타기 속에서도 어째 이 세 사람이 헤어질 것 같지 않다는 건 기분 탓일까. 세르주의 좋은 집, 비싼 그림 앞에서, 수트 빼입고 해체주의와 세네카를 들먹이며 시작된 인물들의 열띤 논쟁은 결국 서로를 향한 지극히 ‘찌질한’ 애증을 드러낸다.


각자가 친구를 비난하는 데서 밝혀지는 건 오히려 친구의 옆에 있음으로써 강조되는 자기 자신의 결점에 대한 미움이다. 자기 자신의 결함을 숨기기 위해 비난의 방향을 친구 쪽으로 돌리려 할수록 오히려 자신의 치부가 격정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마크는 지금껏 자신이 친구들 관계의 중심이며, 두 친구의 우상이라 생각했고, 그래야만 했다. 마크의 날이 선 말들은 세르주가 이제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술적 교양과 안목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비하이다. 세르주는 두 친구의 아내와 결혼에 대해 중점적으로 헐뜯는데, 여기엔 세르주 자신이 이루지 못한 가정의 꿈이 들어있다. 이반은 그 둘 사이에서 한 사람만의 입장만을 지지해야 상황을 피하려고 고군분투하며 특유의 우유부단함을 드러낸다. 세 사람에게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만, 그 친구 관계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안정적이고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음을 스멀스멀 깨달아가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이다.


세르주가 산 그림이 그 관계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세르주의 말에 따르면,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흰 그림에는 흰색 줄이 있다고 한다. 서로 오랜 시간 멀어져 있으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매끄러운 흰 바탕으로만 보였던 그들의 관계에도 흰색의 균열이 있었다. 하지만 소품으로 나온 그림에 어떤 선이 존재하는지는 관객에게도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관객도, 세 인물도 각각 자신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그 흰색 선의 존재를 바라보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두 사람보다 더 많은 교양을 가진 ‘해결사’인 양 행동하는 세르주는 그 그림에서 흰색 선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 듯 하지만 상식적으로 보기에는 도통 말이 안 되고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마크는 흰색 줄이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는데, 사실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이반은 어떻게든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방향으로 줄의 있고 없음을 정하고 싶다. 그리고 세 사람은 서로의 시선의 옳고 그름을 증명하기 위해 작품을 꺼내 놓기도, 숨겨 놓기도, 이쪽에서 보기도, 저쪽에서 보기도 한다. 자신이 있던 위치에 고집스럽게 멈춰서서 흰 선을 찾는 것을 넘어서서, 서로가 요구하는 위치와 각도에서 그림을 살펴보려 시도하기 시작한 세 사람. 그렇게 흰 선을 찾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세 사람이 각자에게 느끼는 균열과 서운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세 인물 각자는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그 방식이 참 다르다. 하지만 연극은 그 중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무대에는 서로 완전히 다른 화풍을 가진 세 가지 그림이 드러난다. 이 세 그림은 각각 세 인물의 집 벽에 걸려있는 작품으로, 각각의 인물을 상징한다. 한 인물의 독백이 시작되거나 그의 일상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 인물에 대응되는 그림에 조명이 비춰지는 연출로 알 수 있다. 비록 세 사람은 서로의 집에 걸린 작품에 대해 ‘미친 짓’ 또는 ‘졸작’이라 비난하지만, 각자의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칠해낸 서로 다른 예술작품이다. 화풍은 서로 다를지라도 애써 그려 세상에 보여지는 작품이기에, 세 사람은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보여주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결국 공연의 후반부, 이반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어 세르주의 작품이 ‘하얀 판때기’임을 소리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는 세르주의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세르주는 마크에게 펜을 쥐어주며 자신의 앙뜨로와 작품 위에 그림을 그리게 함으로써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친구를 더 앞에 두어 본다. 마크는 펜을 잡고 흰 그림 위에 ‘스키를 타는 사람’을 그린다. 그 시점부터 모두는 드디어 흰 그림 위에 존재하는 하나의 분명하고 가시적인 이미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세 사람은, 관계 회복을 위한 숙고의 시간을 가진다.


당연해 보였던 ‘친구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세르주의 그림 위에 새로 그려진 이미지처럼, 스키를 타고 눈길을 내려가는 아슬아슬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는 장애물 없이 속도를 내며 달려가고 있었기에, 또는 그러고 있다고 믿었기에 그 위태로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art’라는 단어는 예술을 뜻하기도 하지만,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전문적인 기술을 뜻하기도 한다. 앙뜨로와의 그림 위에 그려진 그림은 다시 지워지고, 그림은 다시 흰색으로 돌아오지만, 한 번의 격동적인 훈련 끝에 마주한 그 그림은 이전과 같은 하얀 판때기가 아닐 것이다. 관계라는 예술작품을 만들어가기 위한 기술을 터득해가는 세 어른들의 유치한 싸움은 모습은 코믹하게 그려지면서도 관객의 삶과 맞닿은 씁쓸함을 선사한다.

 

우리 나라에서 더블케이 엔터테인먼트 주관으로 공연되고 있는 연극 <아트>는, 캐스팅에 있어서도 그 재치를 꾸준히 드러내 왔다. 30-40대의 배우들부터 백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배우들이 무대에 섰고, 실제 친한 사이라고 익히 알려진 배우들이 ‘실친 케미’를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다. 캐스팅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비단 특정한 인생의 시기를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제한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수 없이 존재할 세르주, 마크, 이반들은 세 사람은 흰 그림 위에 무엇을 보게 될까.

 

 

[박보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