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짧음이라는 의미 - 나를 채우는 일상 철학 [도서]

글 입력 2024.01.2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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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나를 채우는 일상 철학.jpg

 

 

사유가 부재한 시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 ‘사유가 부재한 시대’라고 분명히 어딘가 적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것이 썩 맞는 분석이라고 여기지 않는 까닭이다. 과거와 현재의 낙차 속에서 왜인지 언제나 거짓을 논하게 된다.

 

왜 우리는 지금 시대를 ‘사유가 부재하는 시대’라고 이야기하는가? 전 세계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모여서 세계평화나 기후 위기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5분도 안 되는 짧은 영상에 인간들을 모조리 중독시킬 방법에 관해서만 연구한다. 그들은 과도하게 연결된 디지털 공간을 편성하여, 편집되어 재현한 자아들끼리 뒤엉키게끔 만드는 방법으로 우리의 집중력을 훔쳐 간다. 인재들이 절도범이 된 이유는 사유의 부재 때문인가? 아니면 인재들이 절도범이 되었기에 사유의 부재가 도래한 것인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다를 바 없는 순환논증 속에서, 다시금 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은 진짜 사유가 부재한 시대인가? 정말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는가?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경구 “너 자신을 알라”의 지식재산권의 소유자는 사실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그러나 마케팅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소유권이 있지 않을까.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소크라테스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지는 재앙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생각해야 한다.

 

무사유에 대한 염원으로 넘기는 숏폼에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자극에 의한 쾌락을 얻는다. 짧은 영상을 보는 순간순간에도 인간의 뇌는 작동한다. 그 방향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 뿐이다. 사유는 언제나 ‘되어가고 있다.’ 방향성은 원초적 쾌락에 맞춰져 있을 뿐, 생각은 대뇌 속 어디엔가, 혹은 입을 벌려 말하기 직전의 입안 어디엔가, 혀끝 혹은 목구멍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 이런 시대에서 《나를 채우는 일상 철학》은 숏폼의 시대에 발맞춘 숏폼-철학책이다.


《나를 채우는 일상 철학》에는 일상적인 질문에 우리가 손가락으로 넘기며 빠르게 넘어갈 수 있는 두 쪽 분량의 텍스트가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책’ 하면 떠오르는 골치 아픔과 지끈거림은 없다. 불쾌를 지웠다는 점에서 한껏 납작하지만, 쉽고 짧고 빠르다. 숏폼 철학책은 그 안에서 짧음의 미덕을 차용한다. 숏폼 동영상이 짧기 때문에 온갖 자극을 왕창 부어 쾌락만을 자극한다면, 숏폼 철학책은 오히려 ‘예고편’에 가깝다. 일상과 맞닿은 질문들에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는 듯한 철학자의 이름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까?”라는 질문에 키르케고르를 불러들여 “목을 매시오. 그러면 후회할 것이오. 목을 매지 마시오. 그래도 후회할 것이요. 어느 쪽이든 후회하게 되오. 목을 매든 안 매든 후회하기는 매한가지요. 선생들, 이것이 모든 철학의 정수라오.”라는 인용구를 제시한다. 목을 매도, 목을 매지 않아도 후회하게 될 것이라면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벗어나는 답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정녕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질문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두 쪽을 가득 채운 이미지로 희석되고, 다음 장의 새로운 질문으로 우리를 몰입시킨다. 그러나 계속 궁금증은 남는다. 희망을 품는 것이 문제가 될까? 이 책은 숏폼으로 짧지만, 손가락을 한 번만 움직이면 사라지지만 휘발되지 않는 감각이 미묘하게 손끝에 묻어 있다.


철학은 세상의 근본 원리를 파악하는 학문이다. 이것이 무조건 어려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원리를 파악하는 일이 쉬울 순 없다. 진리는 간결하다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논증 과정은 간결할 수 없다. 짧음이 주는 미덕은 그러므로, 숏폼 철학책을 읽은 후에 시작된다. 이 숏폼은 철학자들에 대한 예고편이다. 예고편을 보고 궁금증이 생겨났다면, 그다음에는 본편을 찾아본다. 《나를 채우는 일상 철학》은 이 지점에서 성공적인 철학 도서라고 볼 수 있다. 납작해진 철학자를 부풀리는 일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목을 매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궁금하다면, 《나를 채우는 일상 철학》을 펼치면 된다. 그 사유의 시작으로 철학이라는 학문에 발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답은 학문이 주지 않는다. 학문에서 만나는 사상가가 주지도 않는다. 답은 ‘나’에게 있다. ‘나’가 보고 읽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곳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뇌 속 어디엔가, 혹은 입을 벌려 말하기 직전의 입안 어디엔가, 혀끝 혹은 목구멍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생각을 꺼내기 위해서 어쩌면 철학이 조금을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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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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