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생애 첫 번째 연극 - 사중주 [공연/연극]

글 입력 2023.11.2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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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월의 마지막 주입니다. 어느새 한 해가 또 이렇게 다 갔습니다. 작년에도 참 다사다난하다고 생각했는데 올해에도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말랑해집니다. 백 점 만점의 추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간들이었지요.


그러다 문득 8년 전의 오늘을 떠올립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맞이했던 연말이었습니다. 모든 게 새로웠던 그 시절에 무얼 하며 보냈나 싶었는데 딱 이맘때쯤 혼자서 연극을 보러 갔었습니다(이유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극의 제목은 <사중주>였습니다. 내 생애 첫 번째 연극이었죠. 오늘은 그 추억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연극 <사중주>는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독일 극작가인 하이너 뮐러가 집필한 작품입니다. 당시엔 연희단사거리패가 공연을 맡았지요. 발몽과 후작 부인, 단 두 명으로 약 80분 동안 꾸리는 이 연극은 인간이 가진 욕망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 합니다.


생각보다 작았던 극장에서 <사중주>는 후작 부인의 씁쓸한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식탁 아래에서 발몽이 등장하고, 후작 부인과 발몽은 사랑과 성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냅니다. 이윽고 성별을 바꾸는 놀이에 들어간 두 사람은 서로의 욕망에 휩싸여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향해갑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중주>는 저에겐 무척이나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형식적인 모호함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중주>는 극중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수시로 성별이 바뀝니다. 연극이 끝날 무렵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화장과 연이은 극중국 반복으로 이 인물이 누구인지,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가 모호해집니다. 결말에서야 겨우 본래의 후작 부인과 발몽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합니다. 성별이 바뀌는 연극 놀이가 끝난 후, 두 사람에겐 온전한 성별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본래 자아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연기하면서 휘발된 지 오래입니다. 후작 부인의 대사에서도 언급되었듯 피 흘리는 거울 때문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두 인물은 그렇게 세계로부터 잊혀진 인물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욕망으로 뒤엉킨 연극이 끝난 후 자리한 건 기다란 한숨과 허무뿐입니다.


무대 역시 제겐 흥미로웠습니다. 무대 위에는 하얀 식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식탁은 음식을 먹는 장소로서 인간의 욕구 중 하나인 ‘식탐’을 상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탁은 욕망을 드러내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실제로 발몽과 후작부인, 발몽과 조카딸이 섹스를 즐기는 장소도 식탁 밑이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식탁의 색깔이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는 하얀색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색깔의 모순은 역설적으로 순도 100%의 욕망만이 진정으로 순수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사중주>가 정의하는 인간은 말 그대로 ‘욕망 덩어리’이니까요. 어쩌면 데카르트의 말을 조금만 빌려 ‘인간은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최후에 이르러서 욕망의 화신이던 발몽과 후작 부인 역시 각각 흰색 셔츠와 새하얀 속옷만을 입고 있지요. 이는 아마도 욕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인간성이라는 궤변의 방증일 것입니다.


음악 효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악은 음의 조합(화음)들을 공식화할 정도로 규칙성의 산물입니다. 실제로 중세 교회에서는 어보이드 노트, 일명 어울리지 않는 음계를 부르면 그 사람을 처형시켰다고 하지요. 하지만 <사중주>의 효과음은 이러한 음악의 본질을 비웃으며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귀에 거슬리다 못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음악은 어떻게 보면 욕망의 날카로운 속성을 닮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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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희단거리패

 

 

이렇듯 <사중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시학’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이와 닮지 않겠다’며 노골적으로 시위하고 거부하는 연극입니다. 하지만 제겐 그래서 오히려 신선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새로운 것을 마주할 때의 떨림이라고나 할까요.


<사중주>에서 관객은 몰입하지 않습니다. 인물들은 종종 관객들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관객을 극과 떨어뜨려 놓는 결과를 낳습니다. 네, 맞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중주>는 관객을 소외시키는 연극입니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발몽과 후작 부인이 자신들이 비난하는 세계로부터 소외되었듯이 말이죠(물론 관객들이 느끼는 소외는 자신들이 가진 거부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덕분에 관객은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극중 사건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연극을 본다면 조금은 화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돌아와 생각해 보니 <사중주>만큼 비극의 정의에 충실한 작품은 또 없습니다. 시학은 비극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심각하고 완전하며 일정 크기가 있는 하나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 앞서 말했듯 <사중주>는 극중극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발몽과 후작부인은 각각 트루발 부인과 조카딸을 연기하며 혼란스러운 극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형식적으로 대변합니다. 즉, 배우들도 각각 ’발몽‘과 ’후작 부인‘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들이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들 역시 또 다른 인물인 ’트루발 부인’과 ’조카딸’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사중주>는 시학이 내린 비극의 정의에 가장 원초적으로 다가가고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또한 비극의 특징 중 하나인 드라마 형식이 극중극의 방식으로 좀 더 강렬하게 형상화되기도 하죠. 

 

극중 발몽과 후작부인은 여전히 종교적인 관념이 지배하는 세계를 향해 섹스가 구원이 될 수 있다며, 섹스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행위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대입시킵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섹스를 함으로써 받는 쾌락을 통해 온전히 우리의 몸을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즉, 그들에겐 성교가 자신들을 붙잡아두고 구속하려는 세계로부터 석방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들이 ‘세계로부터 자유롭다’라는 명제는 다르게 말하면 그들이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있다’의 사실의 방증이기도 합니다. 성애에 입각한 두 사람의 실존주의 철학은 극중 세계는 물론 심지어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쉽사리 납득되지 않습니다. 관객을 설득하기 위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자극적이라 오히려 반감을 키웁니다. 때문에 그들의 당당하던 자기주장은 어느 순간 세계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이해받기 위한 발버둥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 이야기의 연민과 동정이 출발합니다. 극과 극, 인물과 인물이 혼재된 가운데 뒤엉킨 욕망은 끝내 두 주인공을 세계와 화합시키지 못하고 산화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서히 사멸하는 그들을 보며 그간 가지고 있던 거부감을 잊고, 동정과 연민을 느끼며 카타르시스를 얻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연극을 ‘희극’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시학에 따르면 희극은 추악한 것을 비웃는 연극을 말하지요. 희극에서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못난 인물들입니다. <사중주> 역시 취향에 따라, 혹은 가치관에 따라 외설적이며 기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두 사람의 논리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발몽과 후작 부인을 보다 못난 인물로 얕잡아 보고 싶지도 않구요. 이는 그저 가장 인간적인 것을 탐구하려던 시선의 차이일 뿐이니까요. 일반 사람들에겐 이성과 합리성, 혹은 종교적인 관념이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도구였다면 그들에겐 성과 사랑, 그리고 욕망이 도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내가 이 연극을 희극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은 이유입니다.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초의 (오페라) 경험이 중요하다구요. 내겐 충격적이었던 <사중주>의 이미지가 아직도 선명합니다. 이후로 나는 종종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뮤지컬도 보았고, 전시도 다녔습니다. 영화와 책에 머물러 있던 제 공상 속 세계가 그렇게 한 뼘씩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5년 이후로 정작 이 연극이 재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을 다시 무대 위에서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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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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