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의 충족을 모아두는 맥시멀 캐비닛 - 일리야 밀스타인 전

글 입력 2023.10.1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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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브랜드들과의 협업으로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 급부상 중인 일리야 밀스타인. 그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는 특유의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유명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LG전자의 광고를 통해 작가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더 많은 국내 팬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인기와 영향력을 서울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Ilya Milstein : Memory Cabinet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전시는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하는 국내 첫 대규모 특별 기획전으로, 2023년 9월 20일부터 2024년 3월 3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일리야 밀스타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점 타인과 우리가 사는 세계로 다다르는 여정의 네 개의 섹션을 각각의 '캐비닛'으로 은유하여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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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작가> ⓒ Ilya Milstein

 

 

 

1. 혼자, 혹은 둘이: 인물의 감정에 나를 넣는 감상. 



첫 번째 캐비닛의 섹션명은 동명의 작품에서 따 온 [티레니아해 옆 서재]이다. 첫 섹션은 한 명 혹은 두 명의 인물이 그려진 작품들이 소개된다. [티레니아해 옆 서재]에서는 사회적 시선이 담긴 초기 작품들과 사색하는 한 명의 인물이 있는 그림들, 그리고 가장 가까운 타인이라 할 수 있는 연인과 단둘이 그려진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다.

 

초기작부터 작가 특유의 맥시멀리즘 화풍이 드러나지만 이 섹션의 그림들이 모두 한 명 혹은 두 명이라는 적은 인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만큼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 분명하다. 때문에 이후 섹션들에 등장하는 작품들에 비해 등장인물의 심리에 더 몰입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서재 그림 역시 물건과 책이 가득하지만, 사색하는 인물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와 그림 한가운데 있는 창문 때문에 물건이 와글거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책이나 머그컵, 일감을 손에 쥐고 혼자 서는 창가 너머 풍경은 보이지 않는 소실점으로 우리를 휘어잡고, 창가 옆에 가득한 책과 사물은 하나하나 시간의 손때가 묻어 있어 안정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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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 Ilya Milstein

 

 

한갓진 시간 속 감정을 그대로 옮겨 온 <주말>, <늦오후의 휴식>을 볼 때면 저 그림 속 인물에 나를 대입하게 된다. 치우는 것은 나중에 생각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LP판을 마구 늘어놓은 방 안, 옆에 붙어 있는 고양이. 그리고 네모진 창으로 크게 들어오는 햇빛. 앞서 서재 그림들이 그림 중앙에 창문을 배치해 그림의 공간감을 확장하고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면, 이 두 그림에서는 네모진 햇빛이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만들어낸다.

 

적은 수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것 외에도, 맥시멀리즘 화풍 안에서 일리야 밀스타인이 창문과 빛 등의 장치를 활용하여 시선의 집중과 분산을 재치있게 유도하는 노하우를 볼 수 있었다.


 

 

2. 혼합된 풍경 속의 사람들, 더 다양한 이야기


 

Cabint 2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에서는 더 많은 인물이 더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 등장한다. 일리야 밀스타인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호주 맬버른에서 자랐으며 현재는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두고 활동 중인 일러스트레이터다. 밀스타인은 자연히 다양한 자연풍광과 문화를 접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이력을 알고 나니 전시 두 번째 섹션에서는 그가 생활했거나 여행했을 장소의 풍경을 저절로 상상하게 하는 그림들이 많았다.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과 <만케심 포수반 사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에서 보이는 지역색 강한 색감의 건축물, 그 지역의 기후가 엿보이는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나 또한 이국적인 풍광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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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 ⓒ Ilya Milstein

 

 

실제와 상상, 그리고 예술성과 상업성이 혼합된 풍경도 볼 수 있다. LG 전자의 커미션으로 그려진 <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은 어떤 가정의 흐뭇한 아침 식사 풍경을 다룬다. 다양한 인종의 가족 구성, 서구적인 요리를 준비 중인 듯한 부엌의 모습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자세히 보면 LG 가전을 포함하여 목각 원앙 모형이나 호랑이가 그려진 청화백자 등 한국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또다른 커미션 작품인 <봄베이 사파이어>에서는 광고하고자 하는 주류 상품의 연대기적인 시간과 변천을 하나의 이어진 그림에서 보여주고 있다. 제품의 광고를 위해 그려진 아름다운 식물과 고풍스러운 인물들 때문인지 나는 이 긴 그림 앞에서 알폰스 무하의 상업적인 그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부터 향수, 과자, 비누 제품 등에 그려진 무하의 그림을 보는 당대인들의 기분도 이런 즐거운 것이었을까. LG 냉장고나 한국적인 소품들, 혹은 오랜 역사를 지닌 술에 새롭게 들어가는 재료들이 이렇게 배치되고 표현될 수 있음을 알아가는 기분 좋은 작은 반짝임 같은 것. 이는 예술과 상품이 만나며 감상자이자 소비자(가 될 수도 있는 나)가 그것의 만남에서 발견하게 된 흥미가 반짝거리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Cabinet 2와 3 사이에 마련된 포토존이자 특별 전시 공간인 ‘책거리’가 흥미로웠다. 한국 브랜드와의 커미션 과정에서 한국 문화를 접하게 되며 밀스타인은 자신의 티레니아해 옆 서재와 한국의 책거리가 혼합된 새로운 방을 갖게 되었고, 그 공간에 우리를 초대했다. 이렇게 작업과 조사 중에 파생되는 혼합된 공간, 혼합된 개념들이 참 매력 있다.

 

 

 

3. 도시와 군중. 그 활기와 냉혹. 



Cabinet 3에 걸린 작품들은 공동의 장소, 군중, 번화가 등 더 큰 외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작가가 거주했던 뉴욕 맨해튼 도심의 거리 모습을 담은 그림들에는 여러 인종이 함께하는 미국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이라는 작품에서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로 보이는 인물들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그림에서 키스 해링의 아이코닉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인물이 발견되는 걸 보면 의도된 바인 듯 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하기 전 밀스타인은 순수예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현대미술 외에도 서구 고전미술 모티프도 작품 곳곳에 숨어 있었다. <과학의 정밀성에 대하여>에서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포즈로 앉아 있는 작은 인물들이, <프랑스 마켓>에는 아르침볼도의 과일초상 얼굴이 있다. 고전에서 비롯된 요소들은 밀스타인이 살아가는 현대 혹은 상상 속 미래적 세계에 같은 색조로 녹아들어 어색함보다는 환기를 부르는 정도의 의외성을 안겨준다.


기업 커미션 작품으로 유명 면도기 회사의 제품이 곳곳에 쓰이는 상상의 도시 시리즈가 있는데, 여기서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의 특징을 살리는 부분이 유머러스했다. <상상 속 벨기에> 그림에서는 벨기에의 인기 만화 시리즈 ‘땡땡의 모험’ 주인공 캐릭터와 르네 마그리트 그림 속 인물을 볼 수 있었다. 면도기를 온갖 데에 사용하는 상상의 세계지만 나라마다 유명한 요소를 넣어 반가운 발견의 재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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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 Ilya Milstein

 


Cabinet 1의 <농장에서>, <뮤즈의 복수>가 품고 있던 사회문화적 성찰은 군중을 다룬 작품군에서 다시 등장한다. 밀스타인 일러스트 속 인물들은 대개 긍정적인 감정을 두르고 있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면 부정적인 감정이 출현할 가능성도 높아지는 법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쏠리면 쏠릴 수록 우리는 목도하기 힘든 양태를 보이기도 한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유명 공연 레파토리의 기반인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다. <추락>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연 같은 감정을 보여주고, <미지의 땅>과 <이민자들> 같은 작품은 세계 사회에서 현재 진행 중인 비극을 주제로 삼고 있다. 명암은 항상 동시에 존재하듯, 군중의 활기와 냉혹 또한 이 세상에 동시에 존재한다.

 

밀스타인은 특유의 맥시멀리즘 화풍을 만드는 데에 다양한 장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 목판화, 이집트와 아즈텍의 상형 문자, 그리고 네덜란드 거장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피터르 브뤼헐의 화풍. 커다란 캔버스 위에 그려진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 그리고 각가지 행동을 하며 퇴폐, 아둔함에 대한 경고를 보여주던 보스와 브뤼헐이다. 실제로 밀스타인의 군중 그림을 보고 있으면 브뤼헐의 <네덜란드 속담>이 저절로 떠오르곤 했다. 형식 상으로도, 주제 상으로도, 보스와 브뤼헐 시대에 경계하던 군중의 타락이나 어리석음은 옛말이 아닌 것이다.


 

 

4. 인간이 사라진 이후 



농사를 한 땅은 지력을 소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기에 땅도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나 작금의 인류가 지구 환경을 대하는 세태를 보면 인간이 지구를 혹사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모른 척 하려야 할 수 없는 문제로, 나는 앞날을 떠올릴 때면 종종 기후에 대한 불안감과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이처럼 지구에 인간이 감당 불가할 정도로 와글와글해지고 나면 인류가 사라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나만의 것은 아닐 듯하다. 일리야 밀스타인 전의 마지막 섹션인 Cabinet 4는 인간이 없는 세상의 초상화를 전시했다. 거기에는 코로나 19로 학교 수업이 대체되어 스쿨버스가 운영되지 않던 현실을 반영한 <잃어버린 여름>도 있으나 가상의 미래를 다룬 그림들도 있었다.

 

이 섹션에서 가장 인상 깊었고 좋았던 그림은 <인류 이후에 I>와 <인류 이후에 II>였다. 불곰 한 마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 하나가 동행이 되어 자연 속을 거닌다. 그런데 이 녹색 풍경의 꽃나무들은 조금 다른 데가 있다. 식물들에는 눈코입이 선과 점으로 그려져 있고, 그들은 모두 웃고 있다. 동화적인 풍경이지만 제목을 상기하면 아마 핵폭발으로 인한 인류 멸망 후, 인간 없이 생태계를 회복하고 재생성한 가상의 미래가 아닐까 한다. 문득 애니메이션 시리즈 <어드벤처 타임>이 떠올랐다. 그 애니메이션의 배경은 핵폭발 이후의 세계이고 거기서 살아가는 알록달록한 생명체는 방사능의 영향으로 모습이 극심하세 변형되거나 새롭게 생겨난 종들이다.(주인공만이 유일한 인간이다)

 

인류가 파괴한 녹색이 다시 돌아오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과연 회복된 그곳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을까? 전시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인조 잔디를 깔아 놓아 온통 녹색인 전시실 안에서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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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이후에 II> ⓒ Ilya Milstein

 

 

밀스타인은 자기 작품의 감상자로 하여금 크게 두 단계의 감상을 하게 만든다. 1단계는 첫눈에 다가오는 작품의 주 정서를 느끼는 것이고, 2단계는 그 정서를 충분히 맛 본 후 그림 속에 가득한 인물들과 사물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2단계 과정에서 감상자는 그림의 많은 요소들이 작품 전체의 정서를 겹겹이 쌓아올려주고 있음을 알게 되고, 중간중간 감초 같은 요소들의 발견으로 또다른 재미를 누리게 된다. 하나의 에너지로 다가와 사람을 특정한 감성에 젖게 하는 밀스타인의 일러스트는, 그것을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다시금 전체를 느끼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한편 그의 맥시멀리즘 화풍에서 이 많은 것들이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게 느껴지지 않는 데에는, 작품을 하나로 묶어주는 주 정서 외에도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제와 소재 면에서는 개인의 사색과 가장 좁고 친밀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점점 많은 인원 수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 많던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보여준다. 전시의 기승전결의 전과 결이 마지막 섹션에 안배되어 있지 않은가 한다.

 

우리 삶에는 자기자신, 친밀한 사람들, 느슨한 관계의 사람들과 더 먼 거리의 사람들이 있고, 장소와 시간, 날씨, 그리고 갖가지 물건들이 있다. 주말 오후 창 너머로 비치는 햇빛처럼 소박하지만 충만한 것이 마음을 채워주어 근심 하나 없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어느날은 긍정적이고 든든하던 것들이 인생을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충족감과 소진되는 감각 중 어느 것을 느끼게 될지는 우리를 둘러 싼 상황에 따라 정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정해지기도 한다. 많은 물건들을 짊어지고도 공허할 수 있는 삶이니 마음 먹기에 따라 그 반대도 가능하다.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일관된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들에서 수많은 요소들에 피로감을 느끼기보다 일상의 충만함을 되새기게 되는 이유 역시 밀스타인의 작업관에 있지 않을까. 크고 작은 데서 삶의 충만함을 느낄 줄 알고 그것을 기억해두려는, 감사하고 소중히 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물건으로 가득 찬 데다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세상이지만 인간 개개인의 정신적인 면으로도, 자연 환경을 위하는 측면으로도 우리 모두 심히 소진되지 않고 소진하지 않는 생을 보낼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순간들을 모아둘 수 있는, 튼튼하고 넉넉한 캐비닛 하나씩 모두의 마음에 있기를 바라게 되는 전시였다. 밀스타인의 캐비닛이 맥시멀리즘 화풍의 창작물들이라면, 우리의 캐비닛은 무엇일까.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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