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이나 한바퀴 하시죠

글 입력 2023.09.3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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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실과 별개의 감각적 세계 속에 살아도 될까? 사계절이 있는 나라, 봄에서 시작해서 여름을 거쳐 가을이 도래하고 마침내 한 주기의 끝인 겨울이 지나면 1+1+1+1해서 사계절이다. 그렇지만 내 세계에서 감각은 과학과 조우하지 못했고 계절이나 토양 같은걸 지리책으로 배운다는 것은 퍽 우스운 일로 느껴진다. 자, 거리의 꼬마들아, 책 따위로 계절과 절기를 배우는 대신 바람을 잡아라. 분명 이번 가을은 이곳에 도래한 처음 가을일 것이다.

 

가을의 마음은 파도와 같은 물결을 그린다. 꼭대기와 고랑은 높아지고 깊어져서 모든 것이 풍만한 곡선의 계절이다. 갈비뼈에 휑휑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썰썰함도 풍만함의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시간을 즐기고 있노라면 동요하는 이 감각의 세계에 모든걸 걸고 싶다는 하나의 생각을 마주한다...하지만 그 생각은 점 세 개만큼 부질없다. 마중나오는 문지기 한 사람도 없는, 가망없는, 세계로서는 꽝인 세계. 순간은 오랜 기억으로 늘어나고 길었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무로 소멸한다. 이런 영원을 영영 붙잡을 사람이 있을까? 더 쓰면 오바가 되니 다른 얘기를 해보자. 심취한 언젠가의 자신을 발견하는건 전날밤의 술주정을 기억하는 것처럼 부끄러우니까. 너무 뜨거운건 쿨하지 못하다는게 우리 시대의 에토스..주저리 주저리...

 

 

 

 

한 해가 벌써 다 가버린 것 같다. 본격적인 끝의 시작은 끝보다도 더 끝같다. 아니면 창밖으로 보이는 하이얀 눈과 바닥을 데우기 시작하는 열기가 아직 없고 모든게 텅텅 비어버리는 변곡점이라 그런가. 펑펑, 대신에 추적추적, 가을비는 잘 마르지 않았고 마당에는 썩어가는 나뭇가지들이 굴러다녔다.


아침마다 책을 읽음으로 하루를 시작한지는 한 나흘 됐다. 모두 소설이였는데 김승옥의 무진기행, 차나 한잔, 서울 1964 겨울, 서영은의 먼 그대와 사막을 건너는 법 등...공통점이 있다면 부담없이 아침을 시작할 수 있을만큼 짧다는 것. 그런데 아침에는 몽롱해서 그런지 심각한 것이 심각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자만과 여유로움이 있다. 비정한 소설의 줄거리가 어째서인지 무덤덤하게 다가와 다시 한번 소설의 줄거리를 되뇌이며 스스로에게 감상을 촉구한다. ‘아내의 시체를 팔아 번 4000원이 거리 위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느끼는 바가 없는지?’+ 다시 반복.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읽고는 유투브에 그 제목을 검색해 봤다. 작가가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법이 무엇인지 해설하는 영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을 통해서라도 살아간다’고 한다. 이렇게 작가의 말을 딱딱 알아들을 수 있으니 정말로 신통방통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블로그에서 굵게 쓰기와 글자색을 사용하며 상징과 의도를 해석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워 그 똑똑함은 모른척했다.

 

작가의 의도를 꾸역꾸역 해석하는 것은 웩,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면서도 나는 흰 종이에 문장을 써 내려가는 작가의 얼굴과 손을 상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적힐 수도 있었고 저렇게 적힐 수도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적힌 문장과 문장. 그것은 생존한 하나의 분위기. 


어떤 아침은 끝임없이 고통인 그의 연인을 생각하며 불그스레 달아오르는 주인공 문자의 볼때기, 그리고 그 조촐한 몸에서 나오는 금빛을 느낀다. "그녀들이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문자는 남다른 무엇을 소유했던게 아니었다. 그녀로선 무엇을 하든 그 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한 것뿐이었다...이렇게 해서 월요일, 화요일......토요일을 보내는 사이에 그녀의 존재 자체를 조금씩 연금시켜, 이윽고 일요일이 되었을땐 그녀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빛 물이 들었다." (먼 그대 中) 어떤 아침은 서울이라는 생의 모양새를 찬찬히 만지는 것으로 깨어난다. "아냐, 위자료가 아냐. 너한테 위자료 같은 걸 받을 권리는 없어. 이건 유혹하기 위한 선물이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유혹하는 뇌물이야..." (서울의 달빛 0장 中) 회색의 도시라고 해서 미학이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 미학에 진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부정문으로 문장을 쓰는게 웃길 정도지. 어쨌든, 이 지저분한 혼란 중 숨이 끊어진 줄 생각하고 돌아보면 기여코 박동하는 메스꺼운 팔딱거림이라니, 부끄럽지만 그 발견이 싫지는 않고 도리어 아주 조금 사랑스럽다.

 

문득 색채를 전공하는 친구가 떠오른다. 어릴적 각자가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의 이름을 나열하며 공통점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됬냐는 친구의 농담에 나도 분위기를 사랑한다고 진지한 공격을 할걸 그랬다. 친구는 추석을 맞아 본가인 강원도로 올라갔다. 우리는 애초에 같이 있지도 않았건만 본가로 가는 친구를 보며 마음 한켠이 헛헛해 졌다면 결국 나는 가을에 심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썰물, 간조, 인력 같은 단어들이 거미처럼 걸어다니는 오후를 보낸다.


저녁이다. 나는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금빛이 내 인생에 이리 좋았던 적은 없었지. '먼 그대'에서 문자의 사랑은 말로 설명하면 저질스럽게 단순해지고 불가해해진다. 대신 연금술사처럼 충만한 마법을 부리는 문자의 소박한 방의 내부나 자꾸자꾸 고통스럽게도 멀어지는 연인을 징그러울 정도로 강인하게 따라가는 문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동시에 스스로를 시험하는 수없는 질문들의 주머니를 차고 노쇠한 나귀처럼 지쳐갈 문자의 모습도.  과정 중에는 심취하려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유치해 보이는 것이였으면 한다. 이해와 말들은 잠시 미뤄두는 회화의 밤이라서. 음악이 빠질 수 없기에 'Destination'의 Haruka Nakamura, '차나 한잔'의 조동진을 컵에다 따른다.

 

호로록, 밤은 흐른다.

 

 

[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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