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의 노동을 위하여 - 연극 '스켈레톤 크루'

글 입력 2023.09.1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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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영화 <모던 타임즈>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나사 조이는 일만 계속하던 공장노동자가 무엇이든 볼트로 조여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는 모습은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도미니크 모리소의 '디트로이트 프로젝트' 3부작 중 하나인 <스켈레톤 크루>에서 그 대답을 일부 찾을 수 있다. 구조조정에 직면한 노동자가 자신의 생존과 노동의 가치를 고민하는 모습을 담은 이 이야기를 우리나라에서 극단 적의 초연으로 볼 수 있었다.

 

 



정체성이 된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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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미국 디트로이트. 한때 자동차 제조업으로 활기차던 도시는 최근 몇 년간 문 닫는 공장이 늘어나며 황폐해지는 중이다.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인 페이, 데즈, 샤니타, 레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해고되지 않고 살아남은 ‘스켈레톤 크루(필수인력)’이다. 이들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먹고살기 위해 공장에 다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미혼모 시절부터 29년을 일한 페이에게 이 공장은 살아남았다는 자부심이자 지나온 삶의 증거 그 자체다. 임신을 한 샤니타에게 공장은 아기와 자신의 미래이면서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해주는 '무언가'이다.

 

페이의 조카인 레지는 다른 셋과 같은 공장의 블루칼라 노동자로 시작해 지금은 중간관리자가 된 인물이다. 여기서 일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기른 그에게 공장은 삶의 터전과도 같다. 불만 많은 젊은 노동자 데즈는 다른 사람들만큼 이 일과 공장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깨어 있는 동안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 공장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노동이 이 네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보고 있으면 오늘날의 노동은 우리의 생각보다 다채롭고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노동은 페이, 데즈, 샤니타, 레지의 정체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내는 것이 기본 공식인 이곳에서 이름과 얼굴을 가진 각각의 노동자는 '비용'의 일부로 뭉뚱그러질 뿐이다. 뚜렷한 개성을 가진 네 사람과 달리 정작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들은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데 말이다.

 

 

 

분열하는 노동자, 억압되는 자유



페이는 사랑하던 캐서린의 아들 레지를 자기 아들 이상으로 아낀다..JPG

  

 

스켈레톤 크루의 일상은 공장 폐쇄 소식으로 위기를 맞는다. 페이는 노조 대표와 이모라는 두 역할 사이에서 갈등한다. 노조 대표로서는 당장 다른 노동자들에게 공장 폐쇄 소식을 알려야 하지만, 최선의 방안을 생각해낼 때까지만 비밀을 지켜달라는 조카 레지의 말을 이모로서 거절하지 못한다. 샤니타와 데즈는 소문이 사실일까 불안해하고, 레지는 자신이 관리하는 노동자들과 자신의 상사 사이에서 갈등한다.

 

연극은 공장 휴게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놓고 각 인물들의 내적, 외적 갈등만으로 극을 끝까지 긴장감 있게 끌고 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끝까지 지켜져야 하는 가치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자유롭게 경쟁해 각자의 부를 원하는 만큼 축적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그 자유는 과연 모두에게 적용되는 걸까. <스켈레톤 크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어떻게 노동자의 자유를 침해하는지 보여준다. 공장은 인원 감축을 반복한 끝에 남은 인원을 쥐어짜야 겨우 생산량을 맞추는 상황. 공장을 불신하는 노동자들은 자재를 훔치고, 공장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규칙과 감시를 정당화한다. 심지어는 공정 내 불심검문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른다.


노동자들끼리도 서로를 의심한다. 다른 노동자들은 노조 대표이면서 공장 폐쇄 건에 대해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는 페이를 믿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페이는 최선의 대책을 세우고 있다는 조카(이자 중간관리자) 레지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다들 각자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관객도 의문에 빠진다. 게다가 같은 노동자라도 공장에서 직접 일을 하는 페이, 샤니타, 데즈와 중간관리자인 레지의 처지는 다르다. 레지가 처음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날 왜 그의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도 넥타이 매는 사람이 생겼다며 눈물까지 글썽여야 했을까.

 

 

 

함께 싸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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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모던 타임즈>를 언급하며 오늘날의 노동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는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목표는 ‘경제 자유인’이 되어 노동을 그만두는 것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에 기대하지 않는다. 노동은 지혜를 발휘해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는 일종의 '형벌'이 되었다.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움직임보다 재태크 콘텐츠가 훨씬 더 흔한 이유도 그 때문일 테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 안에서 개개인이 각자도생하려는 시도는 생각하는 것만큼 유효한가.


오늘 짐을 싸서 쫓겨난 동료가 내일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 앞에서 연극 속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운다. 데즈는 늘 총을 들고 다닌다. 노조를 믿지 않는 그는 자기 이익은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샤니타는 대체 불가능한 노동자가 되고자 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절대 자를 수 없는 사람이 되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총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라면 내가 마주치는 사람도 총을 들고 다닌다는 의미다. ‘대체 불가능한 노동자’라는 존재는 29년을 일한 페이조차 손쉽게 정리해고되는 공장에서 어불성설이다.


이렇듯 시스템 안에서 개인적 차원의 대응은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가 매우 어렵다. 또 다시 소수만 부를 독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래서 이 연극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연대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다른 대응 방식을 돌아보면 연대야말로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페이, 데즈, 샤니타, 레지는 다시 한번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다. 이들은 이제 목소리를 높여야 할 대상이 곁에 있는 서로가 아니라 여지껏 얼굴 한번 나오지 않은 전체 공장의 운영자라는 것을 안다. 이들은 노동 바깥에서의 각자도생이 아니라 더 나은 노동을 위해서 함께 싸울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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