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

나의 인생 첫 영화 제작기 - 1
글 입력 2023.08.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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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0일, 홍대 근처에 있는 한 학원에서 삼십만 원짜리 시나리오 강의를 듣기 시작하면서 내 삶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이 기나긴 여정이 막을 올렸다.

 

열여섯 살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겁이 많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만 쏙 빼놓곤 했는데, 때가 되니 의외로 몸이 쉽게 움직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자기가 작가가 될 운명이라고 믿지만, 실은 자신이 없어서 곁에 있는 친구를 견제하는 한 대학생의 이야기였다.


처음엔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단순히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과 직접 손을 움직여 글을 써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내 머릿속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던 이야기도 흰 종이 위에 검은 활자로 입력되기만 하면 불이 다 닳은 야광별 스티커처럼 낡고 허술해 보였다.

 

가장 기본적인 시나리오의 구조도 아직 모르는 것 같았고, 내가 만들어 낸 인물의 감정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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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를 완성하기도 전에 한계에 부딪힌 나는 애정과 열정만으로는 끊임없이 나를 무너뜨리고 작아지게 만드는 이 작업 과정을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시 일어날 힘을 얻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다.

 

미완으로 남겨질 위기에 처한 나의 첫 시나리오는 유령 회원 3년 차를 앞둔 대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운 좋게 감독을 맡게 되면서 회생의 기회를 얻었다. ‘영화’라는 최종 목적지가 생기고 나니 완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나는 내가 벌인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눈물을 머금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초고가 나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 약 3개월, 수십 번의 수정과 퇴고를 거쳐 지금의 최종본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 약 2개월. 장장 5개월이 라는 기간 동안 나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수십 편을 써냈다.

 

당연한 얘기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이제는 정말 끝났겠지’ 하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이상하게 전날 내가 한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조리 갈아엎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환희와 좌절을 오가며 말 그대로 감옥과 지옥 그 사이 어디쯤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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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 몇 년에 걸쳐 제자리걸음 중이었던 나는 그 시간을 견뎌 내면서 굉장히 밀도 높은 성장을 이뤄낸 것 같다. 힘도 없고 무기력한 줄만 알았던 내 안에서 강한 집념을 발견했고,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발전했다.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며 평가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지워나갔고, 잘 이해하지 못했던 시나리오 속 인물을 사랑하는 방법도 배웠다.


아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서툰 부모처럼 나는 처음에 시나리오 속 주인공을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몰랐다. 불안과 자기혐오에 빠진 '은지'가 나의 못난 부분을 쏙 빼다 닮은 것 같아 쉽사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수개월 간 하루도 빠짐없이 은지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그를 꼭 안아 주리라 다짐한 나는 은지의 하루를 앞으로 이끌어 가는 세상의 손길들을 떠올려 냈다.

 

아직은 아마추어 중에서도 아마추어에 속하는 수준이지만, 안 써지면 남의 영화를 베껴서라도 일단 끝까지 가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박찬욱 감독님의 인터뷰 내용을 되새기며 용감하게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나리오가 끝이 났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영화 찍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영화를 만드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던데, 앞으로는 또 얼마나 험난한 길을 맞닥뜨리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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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결과물을 담보로 수많은 사람의 믿음을 사는 행위인 것 같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을 불확실성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이번에는 걱정이 아닌 기대가 되어 나의 앞으로 걸어갈 길을 환하게 밝혀줬으면 한다. 진심을 담은 나의 인생 첫 시나리오가 영화로 서서히 탈바꿈해가는 눈부신 과정이 두 번째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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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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