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열차 안에서

글 입력 2023.07.2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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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에서 누구나 여행자가 된다. 나는 한껏 기대에 부푼 사람처럼 창밖을 바라본다. 우뚝 선 빌딩이 먼지처럼 보일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익숙했던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떠난다는 느낌이 인제야 실감난다.


검정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참고로 나는 열차에서 독서하는 걸 즐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용한 분위기 속,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은 독서다. 타인의 방해 없이 오로지 저자와 나만 간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 시간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깝다. 이제 나만의 고요한 세상에 들어온 셈이다. 소설 속 인물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차례다.

 

지난주 열차를 탔던 날, 옆자리 사람도 나와 같이 독서를 했다. 그녀는 작은 핸드백에서 두꺼운 책을 꺼냈고, 나는 저 조그마한 어떻게 책이 들어갔을까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그가 애독가라는 걸 짐작했다.

 

보통 사람들은 가방에 필요한 것을 넣기 마련이다. 가끔 타인의 ‘왓츠 인마이백’을 보면 평소 그 사람이 어떤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나의 가방에는 늘 책 한 권이 들어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자투리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도 나와 비슷한 사유가 있지 않을까,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동질감을 느낀다. 아무도 모르게 풋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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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조용히 책을 읽는 반면에 나는 이리저리 움직인다. 좋았던 문장을 잊을세라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고, 여운이 가시기 전에 재빨리 생각을 적는다. 행여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가 갈까 아주 소심하게 움직인다. 서로 정반대의 독서 스타일을 가진 셈이었다. 나보다 일찍 내린 그는 두꺼운 책을 살포시 덮고 조용히 사라졌다. 

 

사실 어떤 책을 읽는지 물어보고 싶어 몇 번을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상대방이 읽고 있는 책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을까 짐작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대뜸 다가와 책 제목을 묻는다면 당황할 게 뻔하니 말이다. 약 2시간 동안 나의 옆자리에 함께했던 이에게 마음을 보낸다. 덕분에 잊지 못할 독서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으며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지만, 친밀감을 느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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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에서 책을 읽는 것뿐만이 아니다. 영화를 보기도 한다. 주어진 2시간은 영화 한 편을 보기 딱 좋은 시간이다. 오랫동안 시청을 미뤄왔던 작품 <백만엔걸 스즈코>을 재생했다. 이 영화를 인제야 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인공 ‘스즈코’를 설명한 글을 보자마자 나와 비슷해 보여서, 보고 난 후 긴 시간 동안 지속될 여운을 어떻게 잘 음미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지 못했다. 한 마디로 영화를 피했던 셈이다.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까 봐.

 

재생하고 난 후, 나는 낯선 이방인이 되어 다른 세상을 유영하기 시작한다. 한순간에 전과자가 된 스즈코는 백만 엔이 모이면 어딘가로 떠난다. 바다와 산, 자연이 가득한 외딴곳으로 떠난다. 그곳의 풍경을 보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낯선 곳에서 첫 시작은 어려운 법. 잘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많은 시련을 겪는다. 스즈코는 동생의 편지를 읽고 피하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백만엔 여행을 멈춘다.

 

열차에 내리기 직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스즈코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몇 번의 쓴맛을 겪고 난 후, 자신을 드러내는 게 굉장히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게 속 편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건 회피가 아닌 이기심이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나의 마음을 직시해라,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건 오답이다.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났지만, 스즈코가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확신한다.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비난하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의 눈을 직시할 것이다.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나는 한시름 놓인 기분이었다. 이제 한 발자국 나아갈 것이라고 외친다.

 

열차에 올라타는 일은 늘 새롭다. 머물던 곳을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 때문일까. 여행자가 된 듯한 심정으로 올라탄다. 사실 열에 아홉은 집에 가는 게 목적이지만, 뭐든 어떠하리. 나는 미묘한 웃음을 짓는다. 목적지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표정을 드러낸다.

 

아무도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낯선 사람 역할에 한껏 취한다. 누군가는 내게 열차에 타는 게 지겹지 않냐고 말을 한다. 사실 마음 먹기에 따라 다른 법이다. 오늘은 어떤 주인공이 될지 늘 기대한다. 여행자란 예기치 못한 상황을 기다리는 법이다.


 

[이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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