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위안과 무력감 [영화]

글 입력 2023.07.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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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멘탈'(2023)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기변환] 엘리멘탈 포스터[포맷변환].jpg

 

 

 

양가감정



'엘리멘탈'이 'K-장녀'라는 공감대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을 보고, 이 공감대가 나에게 완벽히 들어맞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위로는 이미 독립해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인 형제들이 있기도 하고(막중한 책임을 지닌 장녀가 아니라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장래에 대한 부모님과의 갈등 역시 크게 겪어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 가도 되겠다 싶어 충동적으로 예매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상영관을 나온 이후 예상 외로 나는 하루 온종일을 생각에 잠겨 있게 되었다. 분명 잘 만든 영화였다. 영화는 전연령가 작품으로서 갖춰야 할 전달력과 동시에 메세지의 깊이를 챙겼고, 이토록 깔끔하게 기승전결이 나뉘면서 그 디테일이 조잡하지 않고 매끄럽게 흘러가는 작품은 생각보다 드물다. 4원소설을 기반으로 한 참신한 캐릭터 디자인과 세계관은, 다른 모든 요소를 제치고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후한 감상을 남기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처음의 가벼운 마음과는 달리, '앰버'의 고민이 나를 괴롭혀온 여러 생각과 너무나 닮아있어 많은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대부분의 호평에 공감하면서도, 무언가 답답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을 꼬박 생각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 이 영화는 지극히 'K'스러운 정서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안은 상처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지만, 동시에 조금은 'K'스럽지 않은 해결법으로 어딘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의 처지에 가슴 깊이 공감했지만, 해피엔딩을 맞는 그를 보며 과연 나는 저런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에 대한 약간의 회의감을 느꼈던 시간. 그 양가감정에 대해 조금 얘기해볼까 한다.

 

 

 

쓸모에 대한 강박


 

사실 엘리멘탈의 전개는 어찌 보면 상당히 정석적이다. 악연으로 만난 페어가 함께 난관을 헤쳐나가며 관계를 다져나간다는 류의 구조는, 전작 중 하나인 '주토피아'를 비롯해 많은 로맨스에서 이용되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실제로 개봉 초기 영화 홍보의 초점이 디즈니와 픽사의 이색 로맨스 정도로 맞춰졌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사람들을 매료시킨 포인트가 된 것은 부모님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서 앰버가 겪는 딜레마와 여러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소재는 아니다. 청년 주인공이 나오는 숱한 이야기에서는 지겨울 정도로 이런 류의 갈등을 다룬다.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는 조금 뻔한 결론과 함께. 엘리멘탈 역시 비슷한 결을 가졌다. 다만 엘리멘탈이 유독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그런 보편적인 갈등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어서 분명한 차별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차별점이란 바로, 이 영화는 과연 무엇이 그런 갈등을 야기했는가에 대한 한층 깊은 답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크기변환] 엘리멘탈[포맷변환].jpg

 

 

앰버를 영화 내내 움직이게 하는 주된 감정은 바로 부담과 죄책감이다. 앰버는 얘기한다. 부모님이 평생을 일궈온 가게를 온전히 물려 받아서 그분들의 꿈을 이루어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평생을 나와 가게를 위해 희생해오셨으니까.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 남자와의, '물'과의 교제를 이어가선 안 된다. 그건 '불'로서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일임과 동시에 '착한 딸'로서의 본분을 잊는 것이니까. 내가 가진 재능을 굳이 펼칠 필요는 없다. 부모님이 그려온 나의 삶에, 그런 재능은 그닥 필요하지 않은 것이니까.

 

갈등의 성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영화는 이를 이민자 서사와 결합해 더욱 설득력을 높인다. 불의 땅을 떠나 도착한 엘리멘트 시티에는 불뿐만이 아니라 물, 흙과 같은 다른 원소들이 존재한다. 불은 물에 닿으면 꺼져버리고, 불은 풀에 닿으면 그들을 태워버린다. 이토록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 나의 존재 자체가 곧 남을 해칠 가능성으로 간주되는 경험은 낯선 땅을 찾은 이방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겪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민자의 거친 삶 속에서도, 앰버가 살아나갈 터를 힘껏 닦아온 부모님의 노고는 앰버가 세상을 겪고 알아갈수록 더욱 뚜렷이 다가온다. 이 모든 풍파를 견뎌온 그들의 사랑이, 앰버에게는 너무나 무겁다.


효를 중시하는 동양 문화권에서 주로 작용하는 희생과 보답의 논리, 그런 희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주변의 환경과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인물이 겪는 대립과 감정의 기저에 깔린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토록 섬세하게, 알기 쉽게, 마음에 와닿게 다뤄낸 작품은 드물다. 그 생생함과 함께 자연스레 떠오른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쓸모에 대한 강박은 가족과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천천히 형성된다. 또 이것은 앞서 지적한 "한 번도 온저히 받아들여져 본 적 없는 경험"과도 연결되어 있다. 존재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무언가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어떤 역할을 해야만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동아시아, 2021.

 

 

효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희생에 보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불'효를 의미한다. 아닐 불(不). 이렇게 사회의 주된 가치관에 반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온전히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생에 보답하지 못하면 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조건부의 용인. 사회가 말하는 수용 조건은, 다시 말해 나의 쓸모는 내가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을 때 갖춰지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을 당연스레 흡수하기 마련이고, 스스로도 그 기준에 따라 자기 존재의 '가치'를 따질 수밖에 없다.

 

결국 희생과 보답의 논리는 쓸모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건 나의 존재를 통해 보답받게 될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용인되지 못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튕겨져 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스스로에 대한 못 미더움.

 

 

ㅇㄻㅌ[포맷변환].jpg

 

 

앰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희생이라는 소모적인 무언가를 자신의 '쓰임'으로 갚아야 한다는 강박은,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인 동시에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착한 딸'로 남으며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고, 또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이런 강박은 우리를 힘겹게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로 인한 상처를 수긍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 상처가 다름 아닌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엮여 있기 때문이다. "쓸모에 대한 강박은 가족과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천천히 형성"된다는 사실은, 납득하는 것만으로 죄책감이 든다. 누군가로 인한 상처를 인정하면, 필시 그들을 향한 원망과 억울함이 잠깐이나마 뒤따르게 된다. 소중한 사람들을 그런 감정의 대상으로 두는 일 자체가,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처럼 느껴진다.

 

나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사랑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이 때때로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실은 가게를 물려받고 싶지 않다고, 내가 이렇게 자주 화가 났던 건 그 때문이었다고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앰버처럼. 그래서 지금 느끼는 부담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나아가 이 무거움에서 벗어나도 된다고 말해주는 이 작품은 너무나 기껍다. 지금의 딜레마가 생겨난 건 내가 유독 못돼먹고, 이기적이고, 나약해서가 아니라고, 실은 우리 모두 비슷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기


 

하지만 서두에서와 같이, 나는 앰버의 결말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온전한 수용의 경험'이 과연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온화하게 흘러가며 모든 것을 머금는 물처럼, 웨이드는 사람들의 모든 면을 있는 그대로 공감하고 이해하려 한다. 앰버의 재능과 고유의 장점을 발견해 응원하고, 자신을 밀어내는 앰버의 가시 돋힌 말마저 감내하는 웨이드. 가끔 화가 나는 건, 자신이 아직 그들에게 공감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대사는 그런 그의 포용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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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이라는 상극의 두 인물이 상보적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 엘리멘탈의 핵심인 만큼, 앰버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웨이드의 존재가 갖는 중요성은 그 자체로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앰버의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계속해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뒤따른다. 앰버의 해피엔딩에는 주변인의 수용과 지지의 몫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가 앰버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웨이드의 포용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앰버 내면의 결단에 대한 묘사는 비교적 빈약해진 경향이 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지를 깨닫게 되었지만, 앰버가 결국 웨이드를 밀어내고 아빠의 은퇴식까지 군말없이 참여했다는 것에서 특히 이 지점이 두드러진다. 앰버의 이름이 걸린 간판에 불을 켜려는 순간, 웨이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앰버는 과연 어떤 길을 걷게 되었을까. 둘이서 목숨 걸고 푸른 불을 지켜내지 않았다면,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 질문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의문으로 귀결된다. 웨이드 같은 연인을, 네가 나의 꿈이라고 말해주는 부모님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네 마음 가는대로 해, 네가 원하는 걸 해, 라며 말해줄 수 있는 주변인을 갖지 못한 사람은 거부 당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난 이에 대한 대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막막했다.

 

그것이 내가 무력함을 느낀 이유였다.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 의식은 지극히 한국적(어쩌면 동양적)이지만, 그를 해결하는 방식은 딱히 한국적이지는 않으니까. 끝내 나를 지지해줄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의 선택이 그들에게 독단으로 읽히지 않는 법에 대해,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이런 한계는 결국, 네가 무얼 하든 응원한다고 말하는 일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의 결심을 존중하는 일, 내가 겪었던 상처를 바탕으로 너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다른 것임을 인정하는 일. 내가 먼저 그런 존중과 인정을 담은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서로에게 무겁게 지워놓은 짐을 조금씩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됐든, 이 이야기처럼 서로를 구해줄 수 있는 건 서로의 존재니까.

 

 

 

황수빈 (1).jpg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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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ㅇㅇ
    • 안녕하세요 출처 밝히고 블로그로 퍼가도 될까요?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황수빈
    • 2023.08.25 22: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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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
    • ㅇㅇ확인이 너무 늦었네요^^; 출처 및 링크 남겨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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