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토록 숨기고 싶었지만, 동시에 지키고 싶었던 – 영화 ‘비밀의 언덕’

부끄럽지만 소중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글 입력 2023.07.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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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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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비밀의 언덕’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96년, 학년이 바뀔 때마다 가정환경 조사서를 써내야 했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들의 부모님이 받는 연봉, 사는 집 같은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랬나 싶다. 하여튼 분명한 건, 가정환경 조사서는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12살 소녀 ‘명은’의 작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명은이 선망하는 대상인 선생님과의 면담 시간.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가지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명은은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부모님의 직업을 숨긴 채 그들을 종이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과 평범한 가정주부로 둔갑시킨다.

 

시장에서 일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겼던 명은의 거짓말은 멈출 줄 모른다. 가족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반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자 모른 체하며 황급히 자리를 뜨고, 큰 회사를 찾아가 아무나 붙잡고 가짜 인터뷰를 한 후 기념사진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아빠라고 속이기까지 한다.

 

부모님이 남들보다 번듯하게 보이길 바랐던 어린 소녀는 발칙한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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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투와 관심이 고팠던 명은의 욕구는 학급 회장이 되고 나서 그 크기를 더 키워간다. 선생님의 인정과 학급에서의 통제력을 차지하기 위한 거짓말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영악하면서도 맹랑한 명은의 행위가 그저 귀엽고 당돌해 보이다가도, 주변 인물들에게 거짓말이 들킬까 봐 대신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 때는 우려와 이유 모를 불편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영화는 거짓말로 진실을 감추는 것, 창피한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묻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명은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을 비춘다. 10대 소녀가 숨기고 싶었던, 그러나 동시에 지키고 싶었던 비밀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나이대의 소중한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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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언덕’의 이지은 감독은 “늘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라면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발칙하고 뜨거운 욕망을 가진 작은 인물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 그런 이상이 투영된 캐릭터가 주인공 명은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가족의 진짜 모습을 감추기 위한 주도면밀한 거짓말.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용돈을 모아 직접 준비한 선물. 회장 당선 공약으로 비밀 편지함을 내세우는 또렷한 목소리. 이 모든 것이 주체적이고 야무진 명은의 캐릭터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고민은 짧고, 실행은 빠르게. 생각한 것들을 모조리 행위로 옮기는 당참과 맹랑함이 눈에 띈다.

 

그러나, 영화는 명은의 당돌하고 발칙한 모습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감수성이 풍부하고 사려 깊은 소녀의 면면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명은이 매사에 숨김이 없는 전학생 ‘혜진’을 통해 솔직함을 정면으로 마주한 후, 진실을 말하는 것과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것 사이에서 골몰히 고민하게 되는 과정과 그 배려심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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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명은과 세상을 이어줬던 가장 중요한 매개체 중 하나는 바로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상을 통해 선생님과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글쓰기 대회에 나가게 됐지만, 원고지를 펼친 채 가족, 사회,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손녀로부터 온 편지’에는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가족의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창피할 정도로 밉고 싫은 가족이지만, 그럼에도 소중하기에 상처를 주지 않고 싶었던 명은의 진심이 그려진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편지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땅속에 묻어두고자 하는 순수하고 어여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솔직함과 거짓말 사이에서 갈등하며 세상을 배워가는 소녀의 성장통이 와닿는다.

 

가정환경 조사서를 뒤집고 새하얀 백지에 자신의 이야기를 웃으면서 써 내려가게 된 13살 명은에게, 앞으로도 서투르지만 진심 어린 가족의 사랑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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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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