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워하고 사랑해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 - 리턴 투 서울

글 입력 2023.05.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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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태생의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헝가리,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다 1628년 네덜란드로 이주해 그의 생애에서 주요한 철학 저술을 내놓으며 21년의 세월을 보냈다. 네덜란드에 체류하는 동안 세 차례 고국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저서 <방법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너무 오래 여행을 하면, 자기 고국에서 이방인이 된다.”

 

책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는 고향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주 네덜란드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앞서 기술한 데카르트에 대한 정보는 박승찬 교수와 노성숙 교수가 집필한 <철학의 멘토, 멘토의 철학>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책의 목적은 서양철학사의 주요 인물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 책에 데카르트가 등장하는 이유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그의 회의주의적인 사상이 그에게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선물할 정도로 당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이 책에서 그의 생애는 사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열쇠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고향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정보인 건 맞지만, 굳이 밑줄을 그어가며 기억해 두고 있을 만큼 책의 핵심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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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굳이 정성을 들여 내가 아끼는 스티커를 붙이며 문장을 기록했다. ‘고국’과 ‘이방인’, 두 단어가 한 문장에 같이 있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오랫동안 내 안에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그 감정의 근원을 파악해야 끝나는 숙제였다. 나는 고향에 대한 애증을 소설이든 일기든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성실하게 숙제를 수행했지만, 내 안의 선생님은 그런 내게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여주지 않았다.

 

고향에서 낯섦을 느끼고 타지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내가 ‘고국에서 이방인이 된’ 데카르트에 공감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데카르트는 평범한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철학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다. 나는 평생 데카르트 같은 천재처럼 사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고국에서 느꼈던 소외감에는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든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입양아란 존재에 관심이 많았다. 타의에 의해 정체성이 결정되고, 자신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시기에 지워버린 정체성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외면할 수 없는 그들이 궁금했다. 몸이 기억하는 정체성과 머리가 기억하는 정체성 사이에 혼란을 느끼는 그들을, 태어난 곳과 성장한 곳이 다르고, 둘 중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의 근원이 되는 곳에서 남들은 느낄 필요 없는 복잡한 감정을 지녀야 했을 그들을 감히 이해해 보고 싶었다. 한국계 프랑스인 프레디의 서울 여행을 담은 영화 <리턴 투 서울>을 본 이유는 그렇게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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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서 이방인이 되다


  

<리턴 투 서울>은 총 세 번의 서울 여행을 다룬다. 첫 번째 서울 여행은 결항으로 일본 여행의 계획이 물거품 되자 가까운 서울은 어떠냐는 항공사의 권유에 따라 즉흥적으로 결정되었다. 허무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고국 땅을 밟은 25살의 프레디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자신의 생부와 생모를 찾고, 생부와의 만남이 성사된다. 자신의 뿌리를 알아가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순탄하지 않다. 생부는 프레디가 프랑스에서 보낸 시간을 존중하지 않고 무작정 손길을 내민다. 프레디를 향한 그의 애정 표현은 프레디가 모르는 한국어로 점철된 문자 메시지처럼 일방적이다. 선을 넘은 애정에 혐오감을 느낀 프레디는 도망치듯이 한국을 떠난다.

 

그로부터 2년 뒤 두 번째로, 또 그로부터 5년 뒤 세 번째로 서울을 찾는다. 7년에 걸쳐 서울에 올 때마다 프레디는 변한다. 그의 외양도 변하고, 그의 곁에 있는 남자도 변한다. 그러나 중요한 단 하나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프레디가 이유 모를 공허함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처음 서울에 가기 전까지 프레디의 공허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계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 주변 사람들과 구별되는 외양, 뿌리에 대한 질문. 프레디가 ‘우연히’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홀린 듯이 위탁 기관을 찾고 생모와 생부를 찾은 것도 마냥 즉흥적인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프레디는 오랫동안 자신이 생모, 생부와 순간을 마음속에서 그려보았을 것이고, 행동에 옮기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결항한 일본행 비행기는 프레디에겐 마지막 신호탄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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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부와 만나는 경험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그린 모습이 아니었다. 언어의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견고했다. 생부의 집에 머무는 동안 프레디는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아무도 불어를 할 줄 모르고, 고모의 서툰 영어 통역이 그나마의 소통 창구이기 때문이다. 프레디가 밀려드는 한국어의 파도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생부와 그의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그리움과 죄책감을 마구 퍼부어 댄다.

 

<리턴 투 서울>의 재회는 감격스럽지 않다. 프레디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안정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부모와 자식을 잇는 인연을 우리는 ‘핏줄’이라 한다. 우리는 그 핏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 존중해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초면에 가까운 사이에 갑자기 친밀감을 느낄 수는 없다. 그 한계를 인지한 프레디는 자신의 공허함이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더 깊은 방황에 빠진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게 되는 서울


 

생부와 생모 사이에서 프레디는 양극단의 감정을 보인다. 함부로 선을 넘고 다가오는 생부에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생모에겐 끈질기게 연락을 시도한다. 생부와의 만남에서 실망했어도 생모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생모를 만나려는 프레디의 노력이 집요해질수록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공허함을 채워줄 외부 대상을 계속 찾으려는 무의미한 노력에 가슴이 아팠다.

 

외로움을 달래줄 대상을 찾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프레디의 노력은 자기 파괴적이다. 생모와 생부, 둘 중 누구에게도 안정감을 찾지 못한 프레디는 다른 관계에 쉽게 다가가고 상대가 떠나기 전에 먼저 선을 긋는 방식으로 결핍을 채우려 한다. 그럴수록 프레디는 더 큰 수렁으로 빠질 뿐이었다.

 

앞서 핏줄도 다른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 그 자체만으로 지닌 마법 같은 힘이 있긴 하다. 프레디는 아버지에게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일갈한 뒤에도 두 번이나 더 한국에 찾는다. 비록 출장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지만, 마지막 여행에는 7년 만에 생부와 다시 만나기까지 한다. 한국에는 프레디를 끌어당기는 어떤 인력이 있다. 프레디는 그 인력을 성숙하게 다루는 법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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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의 프레디가 처음 한국에 온 이후로 8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지만, 그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8년은 프레디가 고국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어쩔 수 없는 그 인력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그럴 때가 있다. 삭막한 세상에 아무도 날 이해해 주지 않아도 유일하게 이해받고 싶은 대상. 그 대상에마저 이해받지 못할 때 느끼는 절망. 프레디에게 한국은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나에게 <리턴 투 서울>은 내면의 안정감은 자기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그와 동시에 외부의 뿌리에 집착하는 마음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하는 영화였다. 프레디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공존하기 어려운 두 진실에서 겨우 중심을 찾았다.

 

 

 

나는 이방인일까,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좋았다’, ‘별로다’의 감상은 떠오르지 않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의문만 느꼈다. 프레디의 공허함이 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서 혼란스러웠고, 어떻게든 그 결핍을 채우려고 발버둥치는 심정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씁쓸했다.

 

입양아를 이해해 보기 위해 이 영화를 봤지만, 결과적으로 거리감만 더 강하게 느꼈다. 태어난 곳과 성장한 곳이 일치하고, 구태여 뿌리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내가 프레디의 외로움을 헤아릴 수 없겠다는 한계만 명확히 실감했다. 입양아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모른 채 무턱대고 공감하려 한 것도 오만이었다. 그렇다고 그 공허함을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핏줄이 남보다 못할 수 있다는 걸, 고향도 타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아도 그 인력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게 사람이다.

 

<리턴 투 서울>은 입양아가 정확히 어떤 종류의 고충을 겪는지, 그 고충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덤덤한 연출로 프레디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여과 없이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도달한 결말은 절망도 희망도 아닌, 프레디가 돌덩어리처럼 묵직하게 자리 잡은 결핍과 마주한 뒤 겨우 내딛는 한 걸음이다.

   

이 글을 다 쓰고 보니 나는 나의 외로움을 입양아에게 의탁해서 헤아려 보려고 한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의 숙제는 스스로 끝내야 한다. 나의 외로움은 프레디도, 데카르트도 이해할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다. 그래도 어떤 점은 어설프게나마 본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결핍은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뿌리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이끌림까지 부정하지는 말 것. 이제 나는 드디어 리턴할 준비를 마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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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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