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잘 포장된 기억

글 입력 2023.04.2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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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모금을 마신 순간으로 되돌아가 본다. [...]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이 틀림없다. [...]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마르셀 푸르스트 작가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한 문장이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끓여준 홍차에 마들렌을 베어먹자, 예전 추억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 보낸 기억을 서서히 꺼낸다.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줬던 마들렌 과자 조각들. 콩브레 마을의 전경들 등. 주인공은 후각과 미각을 통해 추억을 꺼낸다.

 

마치 깊은 곳에 포장된 기억 상자를 집어 천천히 리본을 푸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의 머나먼 기억을 자극했던 건 마들렌과 홍차였다면, 나에겐 무엇이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본다. 우뚝 선 나무와 시원하고 개운한 바람 냄새가 떠오른다.

 

사진은 비엔날레 옆에 바로 위치한 작은 공원이다. 나는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십 년이 지나고 변함없는 이곳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여전하다는 메시지를 남겨주는 이곳. 나의 기억들이 차츰차츰 떠오른다. 한여름 보석바를 먹으며 걷던 6살의 나. 더는 못 걷겠다며 투정 부리던 모습이 그려진다.

 

그 당시 나는 더위에 못 이겨 걷던 걸 멈추고 털썩 앉고 싶었다. 주차장까지 갈려면 걸어야 한다는 가족들 말에 다시 힘을 내며 걷던 어린아이. 10보쯤 걸었을까 봐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우람한 나무들은 춤을 춘다. 가지와 나뭇잎끼리 서로 부딪치며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내 귓가에 계속 울린다.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은 따스해 보였다.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목에 착 달라붙었던 축축한 머리카락은 서서히 떨어진다. 땀으로 젖은 머리가 보송보송하게 말라갈 때쯤 나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나는 뛰기 시작한다. 온몸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부드러웠다. 나는 아직도 그날 바람의 느낌과 냄새를 기억한다. 초·중·고 시절 현장 체험 학습으로 비엔날레를 자주 방문했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공원의 풍경을 바라봤다. 이곳에 2년마다 와도 변함없는 모습에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되어도 그대로인 모습은 나를 위로해 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취향과 성격은 변해간다. 그리고 오랫동안 운영하던 단골 식당도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아주 빠르게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변화한다. 그렇기에 나에게 이 공원의 모습은 소중하다. 소소할지라도 단순한 이 모든 것이 좋다. 나에겐 잘 포장된 기억이다. 언제든 다시 꺼낼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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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봤던 풍경이다. 밖에 보이는 자연들 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까지.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느꼈다. 나는 이 모습을 보자마자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며 결심했다.

 

나의 손은 이미 카메라 셔터를 조용히 누르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들리는 속삭이는 말들과 발소리는 배경음악 같았다.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트러스 향과 우드 향이 섞인 향수 냄새까지.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먼 훗날 어딘가에서 자연과 탁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시트러스 향과 우드 향을 맡게된다면 이 날이 떠오를 듯하다. 나는 이 기억들을 마음 속 깊숙 넣어 놓는다. 그리고 기억 상자를 잘 포장한다. 언제든 다시 꺼내볼 수 있게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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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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