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으로 연결된 우리 [영화]

<애프터썬>, 시간을 뛰어넘은 뜨거운 포옹
글 입력 2023.04.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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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은 기억에 대한 영화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소피와 캘럼이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났던 20년 전의 기억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해와 위로를 나누는 아빠와 딸의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기억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샬롯 웰스 감독은 그저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서 소비되던 ‘기억’의 진정한 의미를 <애프터썬>에서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인생의 자유이용권



열한 살의 소피는 튀르키예 여행 내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강하게 드러낸다.

 

소피 앞에서 말조심하는 청년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깊은 수영장, 아빠의 도움 없이는 바를 수 없는 선크림. 이 모든 것은 소피에게 자신이 여전히 어린아이임을 상기시켜 주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소피는 계속해서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캘럼이 소피 또래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가서 같이 놀라고 말할 때, 소피는 그들을 ‘어린애들(kids)’이라고 표현하며 자기보다 훨씬 큰 청년들과 친해지려고 한다.

 

소피는 화장실 칸에서 그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엿듣는가 하면 숙소에서 아빠 몰래 ‘Girl Talk’이라고 적힌 잡지를 펼쳐보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원피스 안에 비키니를 입고 어른 흉내를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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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후반부에는 소피가 리조트에서 함께 어울려 놀던 한 언니로부터 바 자유이용권을 선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소피는 바텐더에게 손목에 찬 자유이용권을 자랑하며 우쭐한 표정으로 레몬 소다를 한 잔 주문한다.


열한 살의 소피에게 어른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원하는 것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인생의 자유이용권을 지닌 존재들. 그렇게 자유이용권을 손에 쥐게 된 소피는 여행 중에 마주한 어른들의 모습대로, 마이클과 한밤중에 수영장에서 키스하며 레몬 소다처럼 달콤한 어른의 세상을 맛본다.

 

그러나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른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처음엔 달콤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불안의 원천이 된다. 마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나던 아름다운 바다가 해가 지자 어둠을 가득 품고 캘럼을 향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던 것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빛



열한 살 소피가 튀르키예에서 어른이 되기를 꿈꾸는 동안, 캘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사랑에도, 일에도 실패하고 안정된 일상을 얻지도 못한 캘럼은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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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캘럼에게 소피는 힘겨운 삶의 버팀목이다. 캘럼은 여행 중에도 습관처럼 캠코더 속에 담긴 소피의 모습을 찾는다. 그는 여행 첫날 밤부터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소피의 어린 시절이 담긴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소피가 다른 아이들과 노느라 홀로 남겨진 순간에도 캠코더를 꺼내어 소피의 영상을 본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소피는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으로 캘럼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도 한다. 서른한 살 생일을 맞은 캘럼은 소피의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며 누구에게도 생일을 축하받지 못했던 열한 살 생일에 대한 상처를 위로받는다. 캘럼은 마치 열한 살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주체하지 못하고 목을 놓아 운다.

 

소피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에서 캠코더를 놓지 않았던 캘럼은 여행이 끝나자 그 캠코더를 들고 밝은 복도를 지나 어둠의 문으로 들어간다. ‘일상’이라는 어둠 속으로 돌아간 그에게 소피는 말 그대로 어둠을 밝힐 유일한 빛이었을 테다.

 

그렇게 캘럼은 딸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들을 손에 쥐고, 시끄럽고 또 고독한 어둠의 인파 속으로 유유히 스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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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하는 힘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20여 년의 시간 동안 어른이 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점차 받아들였을 소피는 지금, 캠코더를 통해 20년 전의 캘럼을 바라본다.

 

아빠의 미소에 감춰진 공허함을 보고, 한없이 커 보였던 아빠의 뒷모습에서 초라함을 느끼고, 창피하기만 했던 아빠의 춤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를 발견한다. 열한 살의 자신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아빠의 심연을 같은 어른이 되어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소피는 자신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 20년 전 그날의 모습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캘럼을 만난다.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캘럼에게 다가가 화도 내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던 소피는 결국 그를 꼭 안아준다.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뒤늦은 위로라고 할지라도, 영화는 이를 통해 기억이 지닌 ‘연결하는 힘’을 보여준다.

 

캘럼이 소피를 통해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고, 소피가 캘럼과 시간을 초월한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것은 모두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더라도 기억이라는 다리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소피는 앞으로 캘럼에 대한 기억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갈 것이다. 캘럼이 소피에 대한 기억으로 어둠과 같은 삶을 버텨 나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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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좋아. 노는 시간에 가끔 하늘을 올려다 보거든. 그러다 태양이 보이면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그럼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같은 하늘 아래 아빠랑 내가 있는 거니까… 그럼 같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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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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