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슬픔을 떼어서 먹고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3.2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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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라는 퍼즐 조각


이현정·하미나, 『상처 퍼즐 맞추기』, 동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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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변화에 대해 자주 곱씹는다. 너무 무게를 잡는 서두인 듯도 하지만, 이런 심오한 주제를 자꾸 상기시키는 크고 작은 계기들이 있었다. 먼저 작게는 나이, 계절 같은 것. 학기 단위로 한 해를 양분하는 시간 감각에 익숙한지라, 3월에 들어선 지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올해의 내 나이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또 오늘은 볕이 잘 드는 화단에 이르게 벚꽃이 핀 것을 보았다. 두꺼운 외투를 입으면 등 뒤에 땀이 꼽꼽하게 날 정도의 따뜻한 낮을 만끽했다. 조금 굵직한 일들로는 무엇이 있었나…. 일단 1시간 반 정도 거리의 지역으로 이사를 했고, 학기 중과 방학을 반복하던 삶의 템포를 바꿔보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으며, 주변 친구들이 정식으로 사회인의 문턱을 하나둘씩 넘기 시작했다. 

 

내 안의 것, 밖의 것, 그러니까 안팎으로의 모든 변화가 꽤 한꺼번에 몰려들며 나를 새삼스럽게 했다. 지금의 상황은 야금야금 축적된 변화가 가시화된 것이기도 하고, 혹은 갑작스러운 계기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생각지 못한 동안 나를 이루는 것들이 많이 바뀌어오고 있었다. 결국 사람이란 존재가 ‘온’ 것이 아닌, 어떤 조각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한 사람을 마치 퍼즐처럼 나눌 수 있다면, 그 조각들은 각각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시간이 흐르며 어떤 조각들은 계속 촘촘해지고, 어떤 조각들은 갈아 끼워지고, 또 어떤 조각들은 유실되거나 훼손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계속 그 짜임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나도 나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사실 이 퍼즐의 비유는 최근에 읽은 이현정·하미나의 『상처 퍼즐 맞추기』라는 책의 표현에서 착안해온 것이다. 인류학자로서, 혹은 작가로서 사람들의 고통을 각자의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두 여성은 그런 들여다봄의 과정에서 피어난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인식을 편지를 통해 주고받는다. 고통의 실재와 불가해함을 인정하고, 기꺼이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직면해내는 두 사람의 문장들 중 착안점이 되었던 구절을 잠시 인용해 본다.

 

 

“나의 피부에 남아 있는 기억의 감각들,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에 누적되어 있는 상처어린 경험들……. 그것들은 달빛이 비추어지면 우리에게 깨진 퍼즐 조각처럼 날카롭게 다가오지만,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꿰어맞추지 못할지도 몰라. (…) 그렇지만 우리는 알지. 우리에게 우 조교가 있었듯이, 지금 이곳에는 미나가 있고, 내가 있고, 무수한 나와 미나와 우 조교가 있고……”

 

이현정·하미나, 『상처 퍼즐 맞추기』, 동녘, 2022, p. 237.

 

 

“도저히 이해해낼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마치 퍼즐을 맞추는 일 같아. 우리는 끝내 퍼즐이 모두 맞춰진 전체 모습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퍼즐 조각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게 되겠지.” 

 

위의 책, p. 240.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각들의 짜임으로 이루어진 한 존재, 그리고 무수한 파편들 중 유독 날카롭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조각의 이름은 고통이다. 빼곡함 중 유독 텅 빈 부분에 눈길이 가듯, 한쪽 귀퉁이가 나가 성치 못한 고통의 조각은 "끝내 퍼즐이 모두 맞춰진 전체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어떤 부분은 가끔 전체 같기도 한 것이다. 

 

정말 이 독특한 조각이 나의 전부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마치 그 부분에만 확대경을 들여다 댄 것처럼, 과거와 지금과 앞으로가 모두 단일한 고통의 조각으로만 꿰어질 것 같은 기분. 숨어있다 불현듯 튀어나와 나의 현재를 왜곡하는 과거의 고통, 추억으로 담아둔 예전의 행복들을 순식간에 썩혀버리는 현재의 고통, 지금의 예정된 연속을 한없이 무의미하게 느끼도록 하는 미래의 고통. 고통만큼 나의 짜임을 변덕스럽게 만드는 것이 없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날은 잠잠히 줄어들어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일부로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희미하게든 뚜렷하게든 고통은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모두에게, 또 확실하게. 

 

 

“마치 중력처럼, 인간의 고통은 그 시작점이나 원인이건 무엇이건 간에 우리의 삶에 가장 선명하게 실재하는 진실이라고 생각해.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듯, 고통의 문제는 우리의 삶을 늘 잡아당기고 있어. (…) 아마도 그래서 내가 고통의 문제에 이토록 집착하는 게 아닐까 싶어. 내가 인간인 한, 그리고 인간의 삶에 관심이 있는 한, 고통에 등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 나는 이렇게 생각해. 고통이 중력이라면, 우리는 그 중력에 발을 딛고 삶을 꾸려가야만 해. 중력 속에서 집도 짓고, 마을도 만들고, 심지어 우주선도 띄워야 하지."

 

위의 책, pp. 249-251.

 

 

”하지만 아무리 고통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우선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어야 해.”

 

위의 책, p. 252.

 

 

중력 속에서 "발을 딛고 삶을 꾸려가"기 위해서, 나의 무게만큼을 정확히 감당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고통의 존재를 직면해야 한다. 공기처럼 나를 둘러싼 것을 이해하진 않고선 그것에 대응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고통의 언어를 듣고, 수집하고, 기록하고, 해석하는 저자들의 정교한 작업은 그런 직면과 소통에의 의지다. 

 

하지만 고통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절망스러운 순간들이 분명 있다. 우리의 삶이 고통의 중력 속에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원망스러워 못 견디는 순간들. "견딜 만한 것"이 못 되는 고통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떡해야 하지? 지독한 응시가 필요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것이 기만이 될 수밖에 없는 거대한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 때 떠오른 것은 하나의 시였다. 

 

 

 

슬픔을 떼어서 먹고


안희연, 「슈톨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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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인이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시는 처음 발표 되었을 당시 '현진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고, 그에게 선물하고자 쓰인 것이라고 한다. 다만 시집을 엮을 때 이것이 모두의 이야기로 읽히기를 바란다는 마음과 함께 부제를 생략했다고 말한 바가 있어, 왜 이 시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논해봐도 될 듯하다.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슈톨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 조각씩 잘라 먹는 기다림의 빵.

 

 

추정컨대 시에 등장하는 '너'는 소중한 이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다. 몸에 좋다는 걸 일일이 다 찾아서 먹일 정도로, 안위를 염려하고 애틋하게 돌보던 사람의 허망한 죽음.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올 줄 어떻게 알았겠"냐며 여상히 덧붙이는 그의 담담한 말투는 비극적 경험과 대비되어 그가 지금의 담담함을 얻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을까를 짐작하게 한다. 설탕이 잔뜩 묻은 달콤한 빵을 한 입, 또 한 입 먹으며 맛있다는 감탄사를 반복하는 일과 죽음을 얘기하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 버터향 가득한 디저트 카페에서 '너'와 화자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실제로 슬쩍 본다면 일상적인 수다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 상실을 얘기하고 있는 줄은 모를 정도로 의연한 분위기겠지. 그래서 오히려 저릿하다. 

 

일단은 산뜻한 '너'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의연히 대꾸하는 것이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도리어 내가 무거워하는 일이 주제넘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하지만 이 고민은 나의 고민이기 훨씬 이전에 '너'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비극을 경험했든,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삶이 자비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겨우 끼니를 삼켜내는 목구멍과, 지독한 불면 속에서도 살기 위해 몰려오는 졸음. 그렇게 자비없이 이어지는 삶 속에서, 겨를 없는 순간들 속에서, 상실의 기억은 때때로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했을 것이고, '너'에게는 그 사실 자체가 죄책감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민했을 것이다. 아픈 기억은 아프기만 한 채로 두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상실을 저버리는 것인가.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 수만 개 가졌더라도//
 

 

시인은 그 나름의 답으로 위와 같은 구절을 내놓는다.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 가지고 있는 고통의 퍼즐은 "수천 수만 개"일 수 있어도, 그 조각은 너무 변덕스럽고 날카로워서 계속 모습을 바꾸어도, 그것을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에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곧 그 고통을 저버리는 일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얼마든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해도 된다는 것.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한번 자리잡은 고통의 조각이 사라지지는 않기에, 정신없이 겨울을 사랑하고 보니 그 사랑이 그려내고 있던 것은 그리움의 형상일 수 있다. 그리움을 입에 담아보려다 못내 겨워서, 그걸 입 밖에 내면 한 조각만큼의 무게가 수만 조각의 무게가 될 것만 같아서 겨우 그런 마음을 실어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때가 되면 길어나는 풀, 나를 필요로 하는 작은 생명들, 어쩌면 기다림, 그리고 삶까지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고통을 한 조각씩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들, 사랑하는 것들, 슈가하이가 오도록 설탕이 잔뜩 묻은 달콤한 디저트같은 것들. 결국은 눈물 자국이 남도록 펑펑 울게 되더라도 울고 나면 우리는 그 슬픔을 한 조각씩 잘라 먹을 수 있다. 이겨내지 않아도 된다. 전력을 다해 견디지 않아도 된다. 잘라먹을 빵과 설탕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렇게 한 조각씩 삼켜내면, 삼켜내는 동안 시간이 오래오래 흐르면, 그렇게 살아내면, '너'의 입술이 삼킨 설탕들은 속에서 뭉근히 끓어 고통의 조각들을 졸여낼 것이다. 
 
 
 
불가해한 것들을 품어내면

  

설령 비슷한 류의 경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삶의 맥락이 모두 다른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듣고 말하고 응시해도, 서로의 짜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같은 것은 역시 도달할 수 없는 종착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과정을 무의미하다 칭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서로 연결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하지만 스스로에게도 불가해한 고통의 조각들을 품기에는, 그것을 나의 일부로 설명하고 소통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때, 우리는 잊고 있던 서로의 다른 조각들을 상기시켜줄 수 있다. 고통을 "견딜 만한 것"으로 여과시켜주는 조각들을. 그렇게 더듬어나가듯 존재의 짜임을 짚어나가다 보면, 변화해온 스스로가 기꺼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프게 품고 있던 조각이 있었기에 지금의 짜임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날, 이제는 고통의 중력 속에서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할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런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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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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