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환영 헤치기 [문화 전반]

시-스루(see-through) 가면 써 보기
글 입력 2023.03.10 09:50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스티커 놀이, 다들 해봤을 거다. 라떼는 말이야, 문구점 가면 제일 먼저 뛰어가는 코너가 스티커 코너였다.

 

예쁜 언니 아바타에 귀여운 옷과 아기자기한 액세서리 스티커를 붙이며 꾸미고, 친구들과 투닥거리며 역할 놀이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다. 이 놀이를 하면서는 무조건 내 아바타가 가장 예뻐야 했다. 친구들의 아바타보다 내 것이 월등히 예쁠 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다행감이 스티커 놀이의 요점이었다.

 

아바타만은 가장 예뻐야지! 현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타고난 외모는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아바타만은!

 

좀 더 크고 나서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마인크래프트'라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네모난 블록을 쌓아 집을 만드는 게임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집만 짓는 게임은 아니다.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맵'이라는 시스템을 개설하거나 그에 입장해야 하는데, '맵'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갖춰놓지 않은 상태로 유저를 '불러놓기'만 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저가 발로 뛰어야 한다. '내가 직접' 사냥을 하거나 채집을 해서 먹을 것, 입을 것, 누울 곳을 모두 만들어 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친구와 같은 와이파이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다면 같은 맵에 입장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 기능이 있어,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틈날 때마다 이 게임을 했던 것 같다. 사냥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친한 친구와 함께 한다는 것이 이 게임의 메리트가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보호받는 입장인 청소년이 부모나 사회의 시선을 벗어나 '자의로' 세상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흥미요소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등교하고, 학교 끝나면 학원으로 이동해서 늦게까지 수업을 듣고는 집으로, 집에 와서는 숙제를 하고 취침하는. 그러한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도피처와도 같았기에,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놀고만 싶었던 아이들의 심리를 저격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몇 달 전, '본디'라는 일종의 애플리케이션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본디'는 유저가 자기 취향에 맞춰 아바타를 디자인하고, 아바타가 생활할 공간을 꾸미는 일종의 '메타버스'이다. 동시에 메신저의 기능도 하는데, 다른 유저와 친구를 맺게 되면 그의 아바타와 소통하기도 하고, 친구가 꾸민 방에 방문해 메모를 남길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유저가 그린 아바타와 아바타의 방은 실재하지 않는다. 현실 속의 그와 그의 방은, '본디' 속에 존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도 있다. 아바타와 그 방에 담긴 분위기나 성격은 유저의 실제 모습과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당사자의 모습은 아바타와 일정 부분 다르기 때문에, '본디'라는 메신저가 유저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기변환]bondee.jpg

 

 

이쯤 되면 내가 오늘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대충 유추가 가능한 분들도 계시겠다 싶다. 오늘 이야기할 토픽은, 페르소나와 일탈, 그 자체에 관한 사색의 결과다.

 

 


21세기는 일상이 된 '가면무도회'?


 

 

'멀티 페르소나'는 ‘페르소나’란 개념에서 가져온 용어다. ‘페르소나’는 연극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지칭한 고대 그리스 용어로,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이 외적 성격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의 모습을 띠는 것이 ‘멀티 페르소나’다.


김보영, 2020, ‘가장 무도회’가 된 예능, 방송가 ‘부캐’ 열풍 왜?, 방송문화 422, 240-246.

 


위의 인용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페르소나'는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가리키며, '멀티 페르소나'는 '페르소나'가 여러 가지인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거기다 보태는 나의 해석을 말하자면, '멀티 페르소나'는 '역할 놀이'와 같은 맥락이다.

 

흔히들 '역할 놀이'를 하면 다른 이를 흉내 내거나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어떠한 역할의 모습을 모방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방을 하고 있는 당사자의 성격과 가치관이 아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나와는 다른 모습을 하지만, 어쨌든 내 성향이 섞여 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즉, 내게 있어 '역할 놀이'는 '상황에 따라 갖고 있는 가치관을 살짝 왜곡하거나, 숨기거나, 드러내는 행위'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나'는 집에서 '딸'의 역할을, 직장에서는 '사원'의 역할을, 학교에서는 '학생'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 역할들 속에서 '나'는 각기 다른 특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며 타인의 모습을 표방한다. 그러나, 그 역할들을 수행하는 면면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타인과는 다른, '나'의 향기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론적으로는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나'라는 자아를 만들어 내는 헛짓거리와 다르지 않다.

 

 

-costume-g3b03b9583_640.jpg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긴다. 대체 왜, 나를 완전히 드러내지도, 감추지도 않는 '역할 놀이'를 하는 걸까? 여러 개의 가면을 상황마다 바꾸어 써야 하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역할 놀이가 왜 사랑받는 걸까? '멀티 페르소나'는 왜 현 시대의 각광받는 키워드가 된 걸까?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다면



인류 이전의 지배종은 어땠을지 모르나, 현재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 지성을 가지고 진화를 거듭해 온 결과로 지구를 점령했다. '타인'이 없는,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그저 길 고양이보다도 생존력이 없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은 타인 없이 살 수 없다는 뜻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 특성은 비대해지다 못해 일반적이게 되었다. 20세기만 해도 내 방의 문만 닫아 놓으면 세상과 단절될 수 있었는데,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생겨 버린 지금은 방 문을 닫아도 세상과 연결된다. 뿐 만이랴, 컴퓨터의 전원을 뽑고 스마트폰을 꺼 놔도 이제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있어 바깥으로부터의 신호가 전달될 수 있다.


집단은 인간을 진화하게 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지만, 동시에 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묵살하는 개념이다. 집단의 의지가 중시될 때 개인의 가치관은 무시당한다. 이게 팩트다. 때문에, 인간은 홀로 있을 때 자신의 머릿속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다시 사회 속에 투입되기 전에 자아를 완성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야 집단 속에서 의미 있는 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이제 완전한 '혼자'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할 틈이 없다. 셀 수 없는 업과 관계가 정신을 짓누르고, 끊이지 않는 정보의 변화가 머릿속을 들볶는다. 타인의 의견은 뇌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를 제대로 소화시킬 '잠시'가 없을 만큼 화제들이 쏟아진다. 쉴 수 없게 만드는 것들로부터의 도피가 불가능하다. 더 이상 도피처가 없기 때문에.

 

 

[크기변환]sasha-freemind-Pv5WeEyxMWU-unsplash.jpg

 

 

이러한 시대 상이 '멀티 페르소나'가 급부상하는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라는 본질이 다양한 상황 속 타인들로 인해 흐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방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내가 던져질 집단의 특성을 반영하면서도 '나'의 모습이 섞여 있는 방패들. 그것들을 통해 타인이 나를 인식할 때, '나'라는 사람의 본성은 비로소 휴식을 맞이하고 사회로부터 얻은 것들을 소화하는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휴식이 '보통'이 된 현재를 바라보다 보면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발전과 진화의 대가로 이렇게까지 괴로운 게 이치에 맞는 걸까. 방패가 없으면 '나'로서의 잠깐의 쉼표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니. 가면으로 위장한 환영을 '진짜' 나로 홍보하는 것에 담담해져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부담스럽지 않은 일탈, 환영 헤치기



일과 학업, 또는 관계에 지친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누구는 여행을 가기도 하고, 누구는 기타를 치기도 하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자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쉬면 된다. 휴식을 원한다면, 방패를 앞세워 잠시 세상으로부터의 신호를 무시하고 나를 보듬으면 된다. 그런데, 혼자만의 휴식도 중요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또 있다.


위로.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공감이다. 어이없게도 인간은 자기 존재를 인정해 주는 타인으로부터 위로받고 공감받을 때 진정한 회복감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진화에 '집단 지성'이라는 가치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집단 지성' 또한,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결국 '나'라는 인간의 본질도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 가장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가면들 속에 '나'를 가둬 놓았었다면, 잠깐이라도 그 환영을 비집고 나와 일탈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다. 당장에 진짜 '나'를 꺼내어 놓을 수 있는, 가까운 타인과의 만남은 그래서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만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길 위에 쏟아야 하는 시간과 비용들이 아깝다면? 이제는 가면을 쓰지 않으면 부담스러워서, 진솔하기 위해 만나는 타인 앞에서도 가면을 쓰게 될까 봐 무섭다면?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부담스럽지 않게, 소소하게 일탈하는 방법이 생겨난 결과가 '아바타 놀이'라고 생각한다. 그 놀이가, 사람들이 숨겨놓았던 정체성을 꺼내어 놓을 수 있도록, 즉, 사회적으로 '나'라는 본질이 실재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도피처가 될 수 있다. 나를 조금 섞어 놓은, 어쩌면 현실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을 수도 있는 아바타를 통해 미묘한 만족감을 얻는 것이 말이다.


아바타도 결국 '멀티 페르소나'의 한 종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에 대해 소심히 받아 치자면, 글쎄, 자의로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가면이 억지로 '살아남기 위해' 써야 했던 가면과 같은 두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순 없는 것 같다.

 

'아바타'라는 시-스루(see-through) 가면을 집어 듦으로 인해, 오히려 부담 없이 근원에 있는 정체성의 표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크기변환]radu-florin-vaFVAHpMiBU-unsplash.jpg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나'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환영 속에 파묻혀 있는 '본질'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진다면.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본인의 정체성을 담은 아바타를 활용하는 것도 갈증을 해소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디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더 특별한 가상 공간들이 탄생하고 주목받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제 2의 세계가 등장한다면, 한 번쯤 나와 닮은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 가 보자. 어쩌면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더 잘 보이는, 두꺼운 환영에 방해받지 않는 맑은 시야로 사회와 타인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했던 색안경을 벗은 타인으로부터, 부담스럽지 않게, '진짜' 나를 위로받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태그.jpg

 

 

[유서인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
  •  
  • 박정선
    • 세상의 누구든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의 탈출을 꿈꾸며 산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학교이건 직장이건 가정이건 어느 곳이든 편안함과 안정도 있을 수 있는 공간이지만 불편함과 어려움은 늘 존재하는데 막연히 일탈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이 글을 통해 돌아보며 진정한 휴식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게 되었다.
    • 1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