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각자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아 [영화]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니
글 입력 2023.02.2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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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친구 M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바쁘다.

 

그녀의 일주일은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퇴근 후, 평일 주 3회 이상은 헬스장에서 운동, 운동을 하지 않는 날은 주 2회 정도 지인들과의 만남. (원래 필라테스도 했는데 그건 이제 쉰다고 들은 것 같다.) 

 

그렇다면 주말에는 좀 쉬느냐고? 아니, 들어보면 M은 집에 붙어있는 법이 없었다.

 

주말에도 연주회, 전시회, 독서 등 문화생활을 즐기며 (가끔은 하루에 두 건 이상 다니기도 한다고.), 그 와중에 블로그 체험단 활동을 일정 중간에 틈틈이 끼워 넣어 야무지게 소화해 낸다는 그녀.

 

영화나 책을 봐도 내 것으로 만드는 데 며칠은 걸리는 느릿한 나, 체력도 약해서 하루에 두 지역을 다니면 금방 혼이 나가는 나는, 그녀의 일정을 듣기만 했는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진심 반 농담 반으로 M에게 물었다. 야,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 안 힘들어?

 

그녀는 이 질문을 나에게서만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M의 친구 어머니는 그녀의 일정을 듣더니 ‘그거 스스로 학대하는 거야’라고 하셨다고. 옆에서 그녀의 매일을 보고 듣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나. 과하게 빡빡한 일정에 그녀의 몸도 조금씩 탈이 나기 시작한 것. M은 그제야 본인이 무리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일주일 간 '바삐 사는 일'을 중단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여기 M처럼, 현대인의 ‘바쁜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해 건강도, 마음도 고갈된 청춘이 또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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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의 삶에 지친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가며 겪는 시골살이를 그린 이야기다.

 

혜원은 서울에서 준비하던 임용고시에 떨어진 후, 그녀의 고향이자 작은 시골 마을, 미성리로 돌아간다. 그녀는 자신이 미성리로 돌아온 것을 고향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곳에 정착하려는 결심이 서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의 실패를 외면하고자 잠시 도피하듯 ‘떠나온 것’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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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오랜 친구 은숙은 어떻게 알았는지 혜원의 귀향 소식을 듣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온다. 귀향 이유를 묻는 은숙에게 혜원은 이렇게 답한다.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진짜 배고파서. 


 

배가 고파서 내려왔다는 혜원의 말은 거짓도, 핑계도 아니었다. 서울의 혜원은 도시의 속도와 기준을 따라잡느라 항상 바빴고,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정성이 들어간 상을 차려줄 시간도, 체력도, 마음의 여력도 없이 지냈으니까.

 

혜원은 서울의 인스턴트 음식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삶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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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서 내려왔다는 말을 증명하듯 혜원은 미성리에서 자기 자신과 친구들에게 든든한 제철 요리를 대접하며 매일을 보낸다.

 

이게 낭만적으로 들린다면 대단한 오해다. 여유롭게 그늘 아래 쉬는 시간보단, 뙤약볕에서 땀 흘리는 시간이 긴 고된 시골살이.


 

입 놀릴 시간에 몸 놀리면, 언젠가 끝이 나게 되어 있어.

 

기다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


 

미성리 어른들의 말씀대로 혜원도 몸을 써 정직하게 노동하고, 자연이 알아서 음식 재료를 내어줄 타이밍을 겸허하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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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자연과 자신의 몸뚱이만으로 자급자족하는 감각을 익혀가며, 스스로를 먹여 살려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원초적 자신감’을 혜원은 갖게 된다.

 

몸은 서울에서보다 피곤할지 몰라도 어찌 됐든 마음의 생기는 되찾은 듯 보이는 미성리의 혜원.

 

사나흘 즈음 있다가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던 그녀는, 겨울을 지나 다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1년을 미성리에 머무른다.

 

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다시 도시로 떠나지만, 머지않아 미성리로 돌아온다. 고향 집 앞에서 환하게 웃는 혜원의 미소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니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이 돼?

 

 

친구 재하가 혜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은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핵심 화두이기도 하다.

 

책 <바쁨 중독>은 현대인의 ‘바쁜 문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그냥 ‘있을’ 때 행복하지 않고, 무언가를 ‘할’때만 흡족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 시간이 돈일 때, 한가롭게 보낸 시간은 돈의 낭비가 된다. 현대 사회의 모든 스트레스의 밑바탕에는 시간은 너무 소중해서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있다. 우리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어딘가에 쓴다."

 

책의 말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혜원이 서울에서 자기를 위해 시간을 쓸 수 없던 것도, 친구 M이 스스로를 위해 잠시의 휴식을 취할 수 없던 것도, 모두 이런 현대의 관습으로 자리 잡은 ‘바쁨 중독’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문득 <리틀 포레스트>가 힐링 영화의 대명사로 꼽히는 건 비단 자연과 시골 배경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영상미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뜨면 농사를 짓고, 밥을 지어먹고, 해가 지면 곤히 잠에 드는. 특별한 스펙타클도, 뚜렷한 기승전결도 없는, 이 영화에 현대인이 열광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던 ‘삶의 중요한 것’들을 스스로 떠올려보게 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각자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아


 

적어도 혜원에게 현대의 ‘바쁜 문화’는 삶의 어떤 해답도 주지 못했다. 고시 합격을 위해 최대의 능률을 내며 바쁘게 살았지만, 정작 자기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외면했던 그녀의 서울살이는 부지런했지만 황망했다.

 

반면, 미성리에서 혜원의 삶은 느리지만 궁핍하지는 않다. 그녀는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들로 둘러싸인다면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무언가 되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아도.

 

 

그동안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이 그만의 작은 숲이었다.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된 혜원은 이내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리틀 포레스트는 그녀만의 ‘삶의 터전’일 것이다.

 

자신의 리틀 포레스트, 즉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뭉뚱그리지 않고 제대로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믿는 일'이다. 어떤 기후와 환경에서 편안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어.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혜원 엄마의 말처럼, 인간도 결국 자연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일부라는 것을 우린 되새겨야 한다.

 

작물이 각자의 계절과 조건에서 각자의 결실을 맺듯, 인간도 각자의 속도와 성향대로, 각자의 리틀 포레스트에서 나름의 의미망을 만들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영화는 말한다.

 

주 5일 근무, 9 to 6, 갓생, 미라클 모닝 ... 획일화된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던 내가 듣고 싶던 메시지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아직까지 '내면의 목소리'를 믿어도 진짜 괜찮은 것인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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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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