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오랜 스마트폰 [문화 전반]

우리도 모르는 새에 묵혀두고 있는 소중한 기록들
글 입력 2023.02.19 14:0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아, 또 까먹었다.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있었나? 매번 바뀌고, 그 당시의 생각이 잘 안 나는 걸 보면, 없는 것 같아. 그러니 비밀번호도 못 찾지.

 


298362099_593610605746765_5701871113990655_n.jpeg

 

 

예전의 내가 걸어놓은 힌트의 답을 고민하며 비밀번호를 찾다가 드는 생각. 소중한 물건? 비밀번호처럼 생각해보면 얘도 마음속에서 주기적으로 바꾸길 권장하는 것 같은데, 이걸로 어떻게 비밀번호를 찾냐.

 

네 꿈이 뭐니? 인생 영화를 딱 하나만 꼽자면?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나는 콕 집어 하나를 잘 대답하지 못한다. 누군가 내 속을 읽는다면 "그럼 여러 개를 말해", "그냥 대충 말해", "그게 뭐가 문제야?"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대충 뱉는단 건, 나라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여! 하여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들에 우열을 가려야 하는 질문을 받고, 그중 하나를 내가 대답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나머지는? 나머지는 뭐가 되는 거야. 또 그런 간단한 질문에 스스로 여러 조건을 덧대 고심해서 고른 하나도 언젠간 바뀌게 될 텐데. 그 서사는 또 얼마나 복잡하냐고! (특 : 밸런스 게임 오래 걸림)

 

그러다 최근 동생과 아크릴 무드 등을 만들러 가게 되었다. '무드 등에 새길만 한 아주 중요한, 깊은 의미가 담긴 무언가가 있나...?' 또다시 생각 공장을 돌려야 하는 순간에 봉착했다. 그러다 손에 쥐고 있던 폰을 바라보았다. 18학년도 수능을 마치고 아빠가 가장 최신으로 바꿔주신, 지금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갤럭시 노트 8.

 

"아니지, 얘는 소중한 물건이라기보단, 없으면 안 되는 존재지." 라고 생각하며 소파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내 생각을 계속 곱씹다 보니, "없으면 안 되는 거, 그게 제일 소중한 거 아닌가?"

 

 

 

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매력대로


 

어떤 노랠 듣고 창작 욕구가 들 때, 혼자의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만, 그럴 만한 친구가 없을 때, 그냥 해결할 수 없는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 화가 나서 무언가라도 던지고 싶은 날에는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그 습관적인 행동에 깊은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스마트폰의 기술력을 탓하고 싶을 정도로 그 중독적인 습관이 밉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감사함이랄 것은 없었다. 없어졌을 때의 짜증 남이 더 컸고, 폰을 바꿀 때의 아쉬움보단 새로운 폰을 맞이할 때의 설렘이 더 컸다.

 

지금, 이 글쓰기를 기회로 삼아 돌아보면, 폰은 내게 정말 수단뿐만이 아닌 정신적인 지지자로서도 곁에 있어 준 게 아닌가 싶다. 난 우울함을 남기고자 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 부분에서 가장 크게 의지가 되었다. 때마다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모르겠는 생각들을 잡아 영상을 찍고, 녹음하고, 메모를 썼다. 물론 그 빠른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진 못하지만, 그 당연함에 맞게 정해져 있지 않은 양식대로의 매력으로 디지털 기록들이 남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웃긴 멘트들.note'

'빡칠 때 순간 대처법.note'

'클라리넷 연주의 흥망성쇠.mp4'

'술 마시고 길거리에서 부른 0310.mp3'

 

등의 사소한 것부터, '슬플 때 이 메모를 봐', '두 달 비건 다이어트 도전기', '영화 <소울> 본 후기', '강아지 솔라 임시 보호 일기' 등 소소한 위로와 대단한 깨달음들의 바탕이 되었던 것들까지. 이 외에도 정말 많다.

 

 

 

오래오래, 묵은지처럼. 맛있는 기록이 되렴


 

그 이후에 나는 빠르게 변화하고, 무엇이든 소비할 수 있는 사회에 걸맞게 갤럭시에서 신형 아이폰으로 갈아탔다. 그마저도 오래 버틴 것이었다. 액정과 뒷면의 유리가 다 부서진 채로 두 달을 지내다, 이번에도 아빠의 권유로 폰을 바꾸게 된 것이니 말이다. 바꾸자마자 노트 8은 왜 나를 버렸냐는 듯 화면이 깜박이고 작동이 느려졌다. 아이폰을 사용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사용법이 유독 손에 익지 않아 갤럭시 노트 8이 그립게 느껴진다. 어쩌면 노트 8에 쌓여있는 기록들과 매시간 옆에 있었던 때가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생기는 여유로운 때가 오면, 먼지 쌓인 금고를 열어보려 한다. 그때에도 여전히 전원을 켜면 잠금 화면은 강아지 솔라일 것이고, 약 5초 뒤에는 느릿느릿 노오란 오줌 필터가 켜질 것이다. 그리고 갤럭시 노트 8에 들어 있는 기록들을 전부 꺼내 책으로 써보고 싶다. 내일 보면 후회될 글들도 다시 보면 좋아질 거라고, 일부러 묵은지처럼 남겨 놓았으니 말이다.

.

.

.

그래서. 내 핸드폰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이지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