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르침이 없는 곳에도 배움은 있다 [영화]

글 입력 2023.02.1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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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2016년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교육을 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에 일임하는 것은 가히 일반적인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학교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누구나 필수적으로 거쳐 가야 하는 사회화 시설 내지는 원활한 구직 및 노동 활동을 위한 일종의 역량 양성 기관 따위로 그 범위를 확장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및 사회화가 이토록 일반적인 아이들의 성장 과정으로 여겨지게 된 만큼, 그러한 세태에 맞서 거대 교육 체제를 향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이들 또한 자연스레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 중 극단적인 일부는 학교라는 교육 기관 자체의 무용론을 설파하기도 하고, 반체제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자녀를 학교 등의 조직에 얽매이게 하지 않기 위하여 자체적인 홈스쿨링을 실시하기도 한다. 2016년 개봉한 맷 로스 감독의 영화 <캡틴 판타스틱>은 여섯 명의 아이들-'보데반', '키엘러', '베스퍼', '렐리안', '사자', '나이'-의 아버지 '벤'이 거대 교육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교육관을 바탕으로 하여 아이들에게 자체적인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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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과 그의 아이들은 외딴 숲속에 자신들만의 이상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자연인에 가까운 삶을 살아간다. 아이들의 모든 교육은 '벤'에 의해 이루어지며, 아이들은 일반적인 학교에서 배우는 보편적인 교육 과정 대신 별을 보며 길을 찾는 법, 식용식물을 구분하는 법, 가죽으로 옷 만드는 법 따위의 보다 생존에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한다. '벤'의 교육은 단순히 이러한 생존 지식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제 나름의 학문적 소양 또한 아이들에게 함양시키고자 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와 같은 서적들이 곧 그들의 교재이며, 시험은 단순한 암기나 문제 풀이가 아닌 토론이나 대화와 같이 창의력을 십분 발휘해야만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벤'과 그의 딸 중 한 명인 '베스퍼'가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를 통해 '벤'의 교육이 평소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베스퍼, 진행 상황은?"

베스퍼 "12장 '끈 위의 세계'를 방금 다 봤어, 왜?"

"'양자 얽힘'도 제대로 이해했어? '플랑크 길이'와 '플랑크 시간'은?"

베스퍼 "문제없어."

"좋아. 내일 점심 먹고 M이론을 설명한 다음, 위튼과 디랙에 관해 보데반, 렐리안과 토론해."

 

 

이와 같이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 과정을 독자적으로 설립하고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극단적인 경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교육 체제 내지는 공교육 기관의 역할에 대한 불신 혹은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은 현실에도 다수 존재한다. 거대 교육 체제에 대한 '벤'의 불신은 현실의 일부 갈등 이론가들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갈등 이론가들에게 교육 제도란 결국 지배 집단의 계급 위치 공고화 및 엘리트들의 대중 통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일부 극단적인 세력의 경우 지배 이데올로기의 사회화에 기여하는 학교라는 기관의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하기도 한다. '벤'은 '노엄 촘스키의 날'을 자체적으로 제정하여 아이들과 함께 기념할 정도로 노엄 촘스키의 열렬한 신봉자 중 한 명인데, 노엄 촘스키가 자신의 저서인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을 통하여 학교라는 교육 기관에 대한 날선 비판을 내세운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벤'이 공교육 제도에 관하여 과연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인물인지 대강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은 곧 대안적인 교육의 형태로 이어진다. 그 믿음의 정도는 각자 다를지언정 적어도 '대안 교육'이라는 이름을 신봉하는 이들은 현실에서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안 교육은 기존의 정통적인 교육 제도에 대한 안티태제로서의 자유교육을 지향한다. 지금까지 대안 교육을 지향하는 이들은 모두 제 나름의 이상적인 교육 체제나 방향을 주장하거나 설파해왔다. 그들 각자의 의견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안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당도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상향은 '정형화된 제도 교육을 넘어 울타리 없는 생생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라는 사실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학교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착화시키는 데 기여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기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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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녹록지 않고, 학교가 아닌 다른 교육 기관 혹은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교육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과연 현대 사회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캡틴 판타스틱>은 이러한 대안 교육의 현실에서 드러나는 명과 암을 보다 간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몇몇 장면에서 '벤'은 이상적인 대안 교육의 지향점에 도달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한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벤'은 그의 아이들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교육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러한 위치를 이용하여 절대적 권위자처럼 행세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과 아이들 간의 의견차가 발생할 경우 이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며, 아이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충분히 용인하는 면모를 보인다. 이는 대부분의 대안적 자유학교가 지향하고 있는 교육 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아이들을 기성 사회체제의 요구를 수용해야만 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닌, 삶과 탐구의 능동적 주체로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 '노엄 촘스키의 날'과 관련하여 '벤'과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렐리안'이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 대화를 통하여 아이들의 주체성을 결코 강압적으로 억누르려 하지 않는 '벤'의 이상적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렐리안 "미친 것도 아니고 왜 노엄 촘스키 생일을 국경일처럼 기념해? 평범하게 크리스마스나 챙기면 안 돼?"

"동화 속 허구의 요정을 찬양하자고? 인권과 지성을 고양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도주의자 대신? 토론해 보자."

렐리안 "됐어."

"아냐, 설명해. 네 주장을 관철시켜봐. 우린 들을 준비가 돼있어.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면 우리 생각도 바뀔 거야."

 

 

'벤'이 이룩해낸 교육적 성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아이들에게 있어 지식이란 단순히 주입되는 무언가가 아닌 탐구와 사고를 통해 직접 습득해야만 하는 진취적인 관념이다. 이는 '벤'이 설계한 독자적인 교육 방식의 가장 큰 성과이며, 일반적인 거대 교육 과정을 통해서는 아이들에게 온전히 체화되기 쉽지 않은 참된 탐구자의 자세에 해당한다. '벤'은 아이들이 단순히 책을 읽게끔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에 관하여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사색을 요구한다. 다음은 '벤'의 교육 성과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일부 장면들이다.

 

 

"'롤리타'? 그건 과제가 아닌데."

키엘러 "진도 건너뛰었어."

"어때?"

키엘러 "흥미로워."

"'흥미롭다'처럼 무의미한 말은 쓰지 마. 명확하게 표현해."

키엘러 "좀 불편해."

"더 명확하게."

키엘러 "그냥 읽으면 안 돼?"

"지금까지 읽은 걸 분석한 다음에."

키엘러 "나이 든 남자가 여자애를 사랑해. 겨우 12살인가⋯"

"그건 줄거리고."

키엘러 "그 남자 관점에서 쓰여진 거라 이해도 되고 공감도 가는데, 그게 놀라워. 본질적으로 아동 성추행이잖아. 근데 그 사랑이 아름다운 거야. 문제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거지. 나이 많은 남자가 여자애를 강간한 거니까. 그래서 심정적으로는⋯ 그 놈이 싫어. 근데 동시에 안됐단 생각도 들어."

"잘했다."

 

 

"권리장전."

사자 "수정헌법 제1조.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해선 안 된다. 또한 언론, 출판의⋯"

"그만, 달달 왼 거 읊으라는 게 아니야. 그걸 네 말로 설명해 보라고."

사자 "권리장전이 없으면 중국처럼 될 거야. 미국은 최소한 영장 없는 수색이나 언론 자유 침해,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형벌은⋯"

"잠깐만, 사자. 2010년 시민연합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연결시키면?"

사자 "기업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무제한 선거자금 후원이 가능해. 즉, 자금을 대는 기업과 로비스트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 거지. 이런 유착관계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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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벤'의 교육이 항상 이처럼 이상적인 형태만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홈스쿨링을 통한 교육은 아이들에게서 단순히 능동적인 학습 태도와 성과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 절대적 가치가 결여된 현대 사회에서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유일한 교육자인 '벤'은 현 자본주의 세태에 굉장히 비판적인 인물 중 하나이며,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아무런 여과 없이 그의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대물림된다. 일례로 '벤'의 아이들은 병원이라는 시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베스퍼 "건강한 사람이 죽으러 가는 데가 병원이라며?"

사자 "미국은 교육수준 미달, 의료 과잉이라며?"

키엘러 "의사협회는 거대 제약회사에 가랑이나 벌려주는 창녀라며?"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병원에 기반한 현대의 의료 체계를 마치 사회의 해약처럼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벤'이 평소 어떠한 사상에 기반하여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공인되지 않은 교육자가 아이들의 교육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될 때, 그리고 그 교육자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된 교육을 제재하거나 견제할 수단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편향적인 가치관을 지닌 채로 성장하게 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벤'의 교육은 그 내용과 방식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아이들의 사회화라는 교육의 기능주의적 성격을 완전히 묵과해버렸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닌다. 물론 '벤'의 목적은 통상적인 사회 관념이 아이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옭아매는 것을 경계하려는 데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벤'의 아이들은 가족 외부에 있는 타인과의 대화조차 자연스럽게 이어가지 못하는 다소 폐쇄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게 되었다. '벤'은 아이들 개개인의 사상을 성장시키고 가족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일에만 신경을 쏟았을 뿐, 정작 아이들이 앞으로 외부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수 있는 난항들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Nike'라는 단어에서 스포츠 용품 브랜드를 연상하기는커녕 그리스 신화의 여신만을 떠올리는 별스러운 인간이 되어버렸고, 특히 장남인 '보데반'은 마음에 드는 여성과의 인연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애처로운 상황에까지 놓이게 된다. 결국 가족이 아닌 외부의 세상과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몇몇 아이들은 '벤'과 커다란 갈등을 빚기도 한다. 다음은 '보데반'이 용기를 내어 '벤'에게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속내를 밝히는 장면인데, '벤'이 이에 대해 반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된 다툼의 일부이다.

 

 

"넌 6개국어를 하고, 수학, 물리도 통달했어."

보데반 "내 말이 그 말이야."

"이깟 대학에서 뭘 배워?"

보데반 "내가 뭘 아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는 별세계 괴물일 뿐이야. 아빠가 우릴 괴물로 만들었어. ⋯ 책 바깥의 세상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결국 '벤'이 그토록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주체성과 자율성은 가족과 학문이라는 울타리 내에서만 그 효과를 발휘할 뿐이었고, 정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삶의 주체성'은 '벤'의 독단적인 교육을 통해서는 아이들에게 전혀 체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로지 이론적 학습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화는 결국 이처럼 수동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 수밖에 없다. '벤'의 실수는 사회화란 사회의 다른 성원들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이라는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해버렸다는 점에 있다. 아이들은 대개 학교나 미디어와 같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접하게 되는 규범이나 가치에 대하여 스스로 재해석을 시도하고, 이를 또래 집단과 공유함으로써 자신들만의 하위문화를 구축한다. 그러나 '벤'의 아이들이 겪은 사회화 과정은 가족이라는 폐쇄적인 소규모 집단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벤'의 교육은 현대 사회의 학교가 재생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서 그 역할을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사회에 대해 직접 이해하고 재해석을 시도해볼 기회조차 완전히 박탈해버렸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오만한 교육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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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후반부, '베스퍼'가 '벤'의 지시를 따르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자, '벤'은 곧바로 '베스퍼'를 데리고 '건강한 사람이 죽으러 가는 데'라고 곧잘 표현했던 병원을 찾아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다소 교만한 자세를 유지하던 '벤'이라는 인물이 겸손한 태도로 의사의 말을 경청하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교차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아이가 정말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벤'이 가장 먼저 맹렬히 기대고자 한 대상은 결국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현대 의학의 힘이었다. '벤'이 그간의 아집을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일정 부분 통쾌하게 여겨지면서도, 오랜 시간 구축해온 '벤'의 이상이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통렬한 쓰라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벤'은 자신의 독단적인 교육관과 양육관이 오히려 아이들의 인생을 망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실과의 타협을 향해 조금씩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냄으로써 자신의 교육 과정을 공교육 과정과 병행시키고, 장남 '보데반'에게는 홀로 해외 여행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를 맺는다.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게 될 '보데반'에게 '벤'은 다음과 같은 조언들을 남긴다.

 

 

"여자랑 섹스할 땐 매너를 지키고 귀를 기울여. 사랑하지 않더라도 상대를 존중해."

보데반 "알아."

"늘 진실만 말하고, 비굴해지지 마."

보데반 "알아."

"매일매일을 네 생애 마지막 날처럼 살고, 용기 있고 패기 있게 만끽해. 인생은 짧다."

 

 

그간 아이들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전수하고자 했던 '벤'이지만, '보데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주요한 가르침은 결국 이 몇 마디 안 되는 아버지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는지도 모른다. <캡틴 판타스틱>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서 비교적 명료하게 드러난다. 거대 교육 체제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이상적인 대안을 구축하기 이전에, 진정한 배움이란 부차적인 가르침이 아닌 원초적인 관계와 상호작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의 교육은 일정 부분의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경험했다. 특유의 진취적인 교육 방식을 통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또래 집단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방대한 지식을 쌓게 만들고 참된 탐구자의 자세를 고양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충분히 고무적이나, 아이들이 앞으로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겪게 될 난항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폐쇄적인 성격의 양육관을 오랜 시간 고집했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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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판타스틱>이 바라보는 교육은 결국 가르침의 문제가 아닌 배움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제공할 것인가를 논하기 전에, 과연 어떤 환경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진정한 배움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거대 교육 체제의 일반론도, '벤'의 이상론도 결코 완벽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현실과 대안의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상적인 타협점을 어떻게든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다. '베스퍼'의 사고가 '벤'에게 깨달음의 계기로 작용하였듯이, <캡틴 판타스틱>은 우리로 하여금 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재고해보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어준다. 가르침이 없는 곳에도 배움은 있다.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배움이 만개할 수 있는 환경을 얼마나 이상에 가까운 형태로 조성해낼 수 있는가일 것이다.

 

 

(본문에 인용된 극중 대사들은 '스튜디오210'에서 제공하는 김현경 번역가의 자막을 참고하였습니다.)

 

 

[김선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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