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과 인식의 윤리적 간극: 이해와 타인의 처연한 행복

코엑스. 메가박스. 유랑의 달.
글 입력 2023.02.0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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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발적인 영화이다. 소아성애라는 소재부터 시작해 관객과 타협하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이다. 반대로 말하면 영화의 시선과 이야기에 관객이 타협하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납치한 남성 소아성애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성인 여성 피해자. 그런 피해자를 사랑하는 소아성애자. 가족과 사회로부터 배제된 인간인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는 문명 사회의 인식론으로는 이해 이전에 인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들의 관계는 스크린 안의 인물들과 스크린 밖의 관객 모두에게 이해받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굉장히 이상한 현상이다. 스크린 안의 인물들은 사라사(히로세 스즈 분)와 후미(마츠자카 토리 분)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스크린 밖의 관찰자인 관객은 사라사와 후미 사이의 일을 알고 있다. 정보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소재에서부터 관객이 이미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도발을 당하고 있는지 도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아성애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아성애와 가해자-피해자라는 단편적인 지점을 넘어야 한다. 온전히 자신을 이해해주는 타인의 존재를 처연한 행복으로만 남기는 것은 관객일지도 모른다.

 

 

1. 현실의 인식과 스크린 사이 윤리적 간극

  

영화는 소아성애자인 후미가 비가 내리는 놀이터에서 비를 맞으며 벤치에 앉은 채 책만 뚫어지게 보는 사라사를 데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족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가족의 외면에 대해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공간이 놀이터라는 것을 주목하자. 놀이터는 아이들의 공간이다. 가족이 잠시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순간에 아이들이 서로를 보호하며 가족을 기다렸다가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는 중간 공간이다. 즉, 놀이터는 돌아갈 가족이 있기에 서로를 잠시만 보호해도 되는, 사회적으로 아이답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이 지나쳐가는 공간이다. 이른바 정상아이의 공간이다. 하지만 후미와 사라사는 정상아이의 공간에 들어올 수 없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척에게는 성폭행을 당해 돌아갈 가족이 없는 사라사는 비정상 아이이다. 돌아갈 가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아이는 아이이기에 온전히 그 말을 들어주지 않으며 사회에서도 쉽게 존재를 배제당한다. 소아성애라는 이유로 친모(사에키 오토하 분)에게 망가진 자식이라 여겨져 좁은 별채에 유폐된 후미도 비정상 아이이다. 어른 남성이라는 외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에게서 외면 당한 채 자랐기에 어른과 아이 사이에 머물고 있는 비정상 아이이며 동시에 소아성애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당한다. 그가 자신의 성애로 타인을 피해입히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저 억압되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소아성애자인 남성 어른과 어린 여자 아이가 놀이터라는 정상아이의 공간에서 만나 우산을 함께 쓰는 장면은 관객에게 경악스럽다. 비를 맞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남성 어른의 장면은 평범한 남매나 삼촌과 조카의 관계일 수 있지만 스크린 바깥의 관객에게 두 사람은 절대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이다. 심지어 우산으로 인해 두 사람의 공간은 우산 안으로 더욱 축소되어 신체 자체가 더욱 붙어 있게 된다. 관객은 영화의 시작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주는 윤리적 불편함에 노출된다. 나아가 두 사람이 같은 시공간을 함께 공유하며 생활하는 모습은 관객의 경악을 극한으로 몰고 가 윤리적 인식을 뒤흔든다. 같은 시공간에서 자신의 성애를 드러내지 않고 사라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하면서 절대 억지로 다가가지 않는 후미. 그의 모습은 소아성애자로서 사라사를 변태적으로 관찰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사라사를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하는 행위인가? 후미의 성애를 알고 있으면서도 지옥과 같은 친척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후미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사라사. 그의 모습은 남성 어른의 위계적, 물리적 권력에까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 차악에 머무는 것인가 아니면 후미와 함께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영화가 후미와 사라사의 관계를 순수하고 아름답게만 연출하고 있는 것인지. 영화의 연출에 자신의 눈이 홀려 있는 것인지. 혹은 홀렸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관객은 자신의 인식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후미와 사라사는 소아성애, 아이, 가해자-피해자에 대한 일반-정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라사는 부모에게 버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친척 집에서 사촌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폭력적이고 집착이 심한 애인 료(요코하마 류세이 분)를 만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살라 한 후미의 걱정은 사라사의 인생에 계속해서 남아있다. 후미가 경찰에 체포되는 순간 후미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도 했고 경찰에게 진실을 말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았다. 사라사는 일반-정상이라는 인식에서 소아성애자에게 세뇌 당한 어린 아이일 뿐인 것이다. 자신의 말을 후미를 제외하면 누구도 들어주지 않은 경험은 사라사를 자신의 안으로 숨게 만들었으며 간신히 내뱉을 수 있는 것은 거부와 공격의 행동없이 자신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 뿐이다. 사라사에게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는 가해자라 낙인 찍힌 후미 뿐이다. 후미는 자신이 소아성애라는 것을 알게 된 모친이 아마도 자신이 태어났을 때 심은 듯한 어린 나무를 "잘못 키웠다"는 말과 함께 뽑아버리는 것을 눈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교도소의 죄수처럼 별채에 유폐된 채 주는 밥을 받아먹으며 자란다. 그에게 가족은 자신을 없는 존재이자 망가진 존재로 보며 사회는 자신의 성애를 범죄 가능성이 있는 장애로 판단해 그를 예비 범죄자로 낙인 찍는다. 그는 원해서 소아성애가 된 것이 아니며 적어도 소아성애를 최대한 자신의 안에 깊이 감추고 어떻게든 정상으로 살아가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후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고자 하는 이는 피해자라 낙인 찍힌 사라사 뿐이다. 이 관계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 관계인가? 



2. 인지부조화의 끝에 도달하는 처연한 행복


판단 불가와 판단 가능이라는 인지부조화 속에서 관객은 영화에 계속 거리를 둔다. 관객에게 사라사와 후미의 전사는 객관적으로 사실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연출이며 하다못해 그 연출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둘의 관계가 윤리적으로 옳은지 판단해야 하는 문제이다. 사라사와 후미 각 개인의 과거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어도 두 사람의 만남이 앞서 제시된 상황에서 뒤늦게 나오는 두 사람의 정보 역시도 두 사람의 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한 연출처럼 보인다. 이미 일반-정상의 기준에 기초한 현실의 윤리 관점을 내재하고 있는 관객에게 <유랑의 달>은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를 서사의 맥락으로 합리화하려는, 가짜 현실로 실제 현실을 덮어버리려는 엄청난 도발로 무장한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라사와 후미 각 개인의 과거사, 둘의 감정 교류를 통해 형성된 불편한 관계, 그러한 과거사와 관계를 모르는 현재의 현실이 둘에게 가하는 윤리적, 제도적 폭력은 둘의 관계에 대해 애당초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관객에게 인식시킨다. 과연 두 사람의 과거가 먼저 제시되고 두 사람이 만나도 그 관계를 순수한 사랑이자 연대로 볼 수 있을까? 가족과 사회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아가 유일하게 자신을 구원해준 이로 소아성애자 남성 어른을 지목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애초에 소아성애자 남성 어른과 어린 여자아이의 관계를 과거사를 통해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식을 깰 준비가 되어 있는가?


폭력적이고 집착이 심한 애인을 사랑이 넘치는 애인이라 생각하는 직장 동료들. 애인의 폭력성을 알고도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사라사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결혼을 기대하는 애인의 가족들. 15년 전 소아성애자에게 납치당했다가 구조된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서 자신을 납치한 가해자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내용을 보도하는 뉴스와 잡지 등의 언론사. 스크린 바깥의 관객과 달리 사라사와 후미의 과거, 료의 폭력성 등에 대해 정보가 부족한 인물들과 사회가 보이는 모습은 사라사와 후미의 전사를 몰랐다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실이자 너무나 당연히 동조했을 현실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스크린 속 현실을 온전히 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영화의 현실을 그저 받아들일 수도 없다. 사라사와 후미에게도, 영화의 현실에도 가까워지지 못하는 관객은 영화와 대치하는 상태에 놓인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고 있으나 계속 바라보고 있는 대치 상황. 관객이 느끼는 판단불가와 판단가능의 인지부조화는 실상 판단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소아성애를 이상성욕이자 변태이자 예비 범죄로, 아이를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현실 관점의 잔재가 영화와 서로 도발하는 형국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관객은 영화에게 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사라사와 후미는 끝내 변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인간이다. 사라사는 료의 폭행과 집착에서 벗어나지만 그를 끝내 온전히 미워하지 못하며 후미에 대해서도 진실을 온전히 전하지도 못한다. 후미는 자신의 소아성애 성향과 달리 성인이 된 사라사를 사랑하는 상태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리카(미쓰다 마 분)에 대한 범죄 오해와 그에 따른 비인격적인 대우를 감내한다. 둘은 다시 마주하게 된 이후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서있을 수 없다. 밤에만 간신히 나옴에도 구름에 가려질 때는 또 그저 가려진 채 하늘을 떠다니는 달처럼 다시 한 번 현실에 짓밟혀 쓰러지고 쓰러진 모습조차도 가려진다. 영화와 대치 상황에 놓인 관객은 현실에 좌절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사라사와 후미에게 다가갈 수 없다. 다가갈 자격도 없다 할 것이다. 현실에서 혹은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하며 관객은 심지어 이 글을 쓰는 필자조차도 둘의 관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와 대치 중이며 그렇기에 사라사와 후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관객은 오히려 그 거리감에 의해 좌절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사라사와 후미를 경유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타인에게 느낄 수 있는 처연한 행복을 엿볼 수 있다. 온전히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타인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인식.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타인과 맺은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그러나 그러한 타인을 바라는,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 깊은 곳에 억눌러져 있는 바람. 온전히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타인이 주는 행복이 존재할 것이되 통계적 필연성에서 불가능에 가깝다는 현실적 인식에서 오는 처연함은 마지막까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를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현실에 균열을 낸다. 영화와는 여전히 대치하고 있을 것이며 관을 빠져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소아성애와 여아, 가해자-피해자 등 현실의 윤리가 주는 찝찝함이 남아있을지라도 영화는 관객에게 처연하게 승리한다.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는 지극히 두 사람만의 관계이기에 다른 이들과 무관하게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에 의해서만 이해받고 행복할 것이며 그로 인해 구원받을 것이니까.


<유랑의 달>은 도발을 하고 있으되 도발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관객이 가지고 있는 현실의 윤리가 이 영화에게 도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바꿔보라고. 가능하지도 않을 행복으로 자신을 홀려보라고. 그래봐야 애초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것으로 억지로 바꾸려는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는 굳이 완전히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자그마한 균열을 내기 위해 보여줄 뿐이다. 어떻게 보여줘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인식이라 해도 어딘가에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유랑하는 이들을 보여주며 그들을 잠시라도 지각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스스로가 쳐둔 덫에 걸릴 것이다. 현실의 인식 안에서 안전하게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라사와 후미와 같은 관계 없이 그저 홀로 떠다니는 상태. 영화와도 대치한 채 어두운 공간에서 완전히 홀로 존재하는 관객은 자신이 사라사와 후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아니, 사라사와 후미보다 더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처연한 행복을 애닯게 바라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낸 작은 균열은 패배처럼 보일지라도 처연하게 승리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고재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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