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발푸르기스의 밤 같았던, 스트링 옥텟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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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악 공연을 다니다보면 다양한 실내악 편성을 볼 수 있다. 실내악 공연을 다니다보면 피아노가 포함된 앙상블을 만날 확률도 생각보다 높겠지만, 현악이나 관악만으로 이루어진 앙상블도 있으며 심지어 현악과 관악이 동시에 배치된 앙상블까지도 종종 만날 수 있어 다양한 악기들의 소리를 원없이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실내악 공연을 다니다보면 현악기 편성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럼 현악기만으로 이루어진 실내악 공연에서 가장 희귀한 편성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현악8중주일 것이다. 현악8중주는 우선 작품의 수부터 다른 편성에 비해 적은 편이다. 여덟 대의 악기를 가지고 교향악이 아니라 실내악을 그려내야 한다는 점에서도 아마 작곡가들에게 도전적인 편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도 현악8중주 연주를 실제로 접해본 경험이 매우 적다.
그런데 이 현악8중주 연주회가 12월 16일에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렸다. HMS프로덕션에서 기획한 스트링 옥텟 콘서트가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 다뤄진 작품은 멘델스존의 작품과 에네스쿠의 작품이다. 현악8중주라는, 국내 무대에서 보기 힘든 편성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는 점에서 스트링 옥텟 콘서트는 12월의 공연을 살펴보던 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분명 실내악이지만 교향악적인 색채도 일견 느껴지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각 악기의 소리가 잘 들리는 실내악적인 매력이 가득한 연주회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스트링 옥텟 콘서트는 2022년을 마무리짓는 연말 음악회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이번 무대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를 필두로 바이올리니스트 김덕우,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그리고 비올리스트 김상진과 비올리스트 김세준, 이에 더하여 첼리스트 이호찬과 첼리스트 이상은이 무대에 나섰다. 우선 비올라 파트에서 김상진과 김세준이 나선다는 점에서 이번 무대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더군다나 바이올린과 첼로 연주자들 역시 무대 위를 종횡무진한 끝에 교수로서 교편을 잡고 있거나 현재까지도 다양한 연주활동으로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실제 연주가 궁금했다.
PROGRAM
Felix Mendelssohn String Octet Op. 20
I. Allegro moderato con fuoco
II. Andante
III. Scherzo. Allegro leggierissimo
IV. Presto
INTERMISSION
George Enescu String Octet Op. 7
I. Très modéré
II. Très fougueux
III. Lentement
IV. Mouvement de Valse bien rythmée
1부가 시작된 순간, 여덟 명의 연주자들이 IBK챔버홀 무대 위로 나섰다. 바이올린 파트는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 김덕우, 김계희, 김다미 순으로 앉았다. 1바이올린이 박규민이었다는 점에서 놀랐다. 아무 생각 없이, 나 혼자 너무 당연하게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1바이올린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선배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후배인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에게 1바이올린으로서의 기회를 열어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비올라는 1비올라로 비올리스트 김세준이 위치했고 2비올라로 비올리스트 김상진이 앉았다. 김세준과 김상진은 함께 행커치프를 맞춘 것인지 김세준이 붉은색 행커치프를, 그리고 김상진이 노란색 행커치프를 착용하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첼리스트 이호찬과 이상은이 순서대로 자리에 앉아 여덟 명의 연주자가 멘델스존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멘델스존 현악8중주의 1악장은 일렁이고 부드럽게 시작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을 필두로 약동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점차 풍성해져갔다. 활기찬 생명력과 온화한 평안이 녹아있어 시종일관 이 녹을 듯한 부드러움에 압도되었다. 그 사이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와 비올리스트 김세준이 호흡을 맞추고, 뒤이어 바이올리니스트 김덕우와 비올리스트 김상진이 이어받는 바이올린-비올라 화음 패시지 구간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1바이올린의 기교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이 도입부에서 박규민의 활강 역시 눈을 뗄 수 없는 별미였다.
이어지는 2악장의 시작이 두 비올라의 감정어린 선율로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무적인 도입부가 아닐 수 없다. 비올리스트 김세준과 김상진의 호흡에 첼리스트 이호찬과 이상은의 짙은 선율이 더해졌고, 이를 바이올린부에서 대응하는 형태로 시작하여 노래 악장이 전개되었다. 부드럽기만 할 것 같던 노래악장 사이에 멘델스존이 숨겨놓은 셋잇단음표의 리듬감 있는 선율은 연주자들만큼이나 관객들도 이 악장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3악장 스케르초는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2악장에서 빠른 템포로 전환되는 동시에 독특한 박자감과 부드러운 셈여림으로 여덟 악기의 소리가 유려하게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부드럽지만 빠르게 시작하는 각 악기의 선율이 서로 주고 받고 이어지자, IBK챔버홀은 일순간 발푸르기스의 밤 그 자체가 되었다. 익살스럽고 즐거운 일련의 흐름 가운데 존재하는 낭만은 현악기들의 아름다운 향연을 더욱 빛나는 순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새소리마냥 지저귀는 듯하기도 하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게 스케르초가 마무리되는 순간은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웠다.
마지막 4악장 프레스토는 첼리스트 이상은에서 시작하여 비올라 파트를 거쳐 1바이올린인 박규민에 이르기까지 역순으로 격렬한 선율을 점층시켜 나가며 폭발적으로 시작한다. 피날레다운 화려함과 빠른 템포, 푸가적인 풍성한 구조로 각 악기 간의 유기적인 선율의 얽힘이 너무나 즐겁게 와닿았다. 쉼 없이 쏟아져내리는 음표들 사이 사이를 밀도 있게 채우는 이 옥텟 구성원들에게 속절없이 빠져드는 피날레였다.
이번 공연의 2부는 에네스쿠의 현악8중주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 무대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를 필두로 김계희, 김덕우, 박규민 순으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리고 비올리스트 김상진과 김세준, 첼리스트 이호찬과 이상은 순으로 위치를 잡았다. 1부에서 1, 2바이올린을 남자 연주자들이 맡았던 것과 다르게 2부에선 여자 연주자들이 맡았다. 그리고 비올라도 주자 변경을 하여 비올리스트 김상진이 1비올라를 맡고, 김세준이 2비올라로 자리를 잡았다. 재밌는 것은 이뿐만 아니라 두 비올리스트들의 행커치프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2부에서 비올리스트 김상진은 보라색, 비올리스트 김세준은 민트색 행커치프를 착용하고 나섰다. 나름의 변주를 주면서 2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에네스쿠의 현악8중주는 시작부터 유니즌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유니즌 뒤에 이어지는 일련의 전개는 매우 오묘하다. 프로그램북에는 에네스쿠가 낭만 시기에도 전통적인 요소들을 담아 작곡했다는 해설이 있었는데, 비전공자인 관객의 입장에서 들을 때에는 그런 점보다 아무래도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넣어 비범하게 전개되는 선율이 훨씬 더 와닿았다. 이국적인 선율 사이로 에네스쿠가 푸가토도 집어넣고 녹턴풍의 다소 차분한 흐름도 이끌어냈지만, 결코 무언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에네스쿠 현악8중주의 특징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두 가지로 축약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유니즌이다. 에네스쿠는 1악장 도입부뿐만 아니라 2악장의 도입부 및 작품 곳곳에서 포르티시모로 연주되는 유니즌을 통해 강렬함을 배가시켰다. 이를 위해 한 호흡으로 연주자들을 모으기 위해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매번 연주자들의 집중을 끌며 주도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여덟 연주자의 호흡이 하나로 모아지고 나면, 강렬하고도 이국적인 선율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기에 에네스쿠의 현악8중주에서 반복된 유니즌은 에네스쿠만의 색채를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주었다.
두 번째 특징은 약음기의 사용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1악장의 말미에서 약음기를 끼고 모든 악기가 조용하고 부드럽게 한 음을 길게 이어가는 동안 마찬가지로 약음기를 낀 채 솔로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며 점멸하듯 악장을 끝맺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의 연주에서 이 특징이 두드러졌다. 또한 3악장의 도입부에서 다시 한 번 약음기를 사용한 부드러운 음의 전개를 강조하는 대목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옥텟의 주된 선율들이 워낙 강렬하게 이어져서 그런지, 약음기를 사용하는 대목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프로그램 북에서는 에네스쿠의 현악8중주에 대하여 그가 아직 대가가 되기 전에 쓴 작품으로 비판적으로 보자면 아쉬운 점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게 어떤 의미인지까지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스트링 옥텟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실제 연주로 들으면서 나에게 명확해진 것은, 젊은 에네스쿠에게는 여전히 그만의 고유한 색채가 있었고 그게 이 8중주에도 잘 녹아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오묘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작품을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1바이올린으로 이끌고, 김계희와 김덕우 그리고 박규민이 함께 호흡하며 바이올린 파트를 가득 채웠고, 김상진이 주가 되어 김세준과 함께 비올라의 무게감이 큰 이 작품의 중심을 잘 잡아준 것이 너무 좋았다. 이호찬과 이상은의 첼로까지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강렬한 앙상블이었다.
본 무대가 끝나자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실내악과 교향악 사이에 위치했던 이 앙상블의 풍성함은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끌어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 환호에 화답하면서, 여덟 명의 연주자들은 커튼콜 끝에 다시금 무대 위로 나서서 앵콜곡 연주를 준비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대표로 관객들에게 인삿말을 남겼다. 추운 겨울밤인데도 무대를 찾아준 관객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한 그는, 앵콜곡으로 글리에르의 현악8중주 2악장을 연주하겠다는 것을 밝혔다.
부드럽게 시작하는 글리에르 현악8중주의 2악장은 러시아 민속음악의 선율을 따서 아주 이국적이고 동시에 매력적이었다. 2부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에네스쿠처럼 민족적인 색채가 두드러지는 작품의 악장을 앵콜곡으로 선곡했다는 점에서 앵콜곡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에네스쿠에 이어 바로 강렬하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뜻하고 가벼운 템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악장을 골랐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다시 한파를 뚫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관객들에게, 인생이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험인지를 속삭이듯이 알려주는 앵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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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만날 수 없는 현악8중주였던 데다가 이번 연주회를 위해 무대를 준비하는 아티스트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찾은 무대였는데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사실 이번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 중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 바이올리니스트 김덕우, 비올리스트 김상진 그리고 비올리스트 김세준의 연주만을 직접 들어보았기에 이들에 대한 마음을 우선시하며 찾은 무대였다. 그런데 4바이올린과 2바이올린을 맡으며 항상 필요한 순간을 아름답게 채워주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멘델스존에서 1바이올린으로 원없이 기교를 드러냈던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 베이스로서 무게감 있게 호흡하며 앙상블의 저음을 사로잡았던 첼리스트 이호찬, 심장 박동과 공명하는 듯한 선율을 전해주었던 첼리스트 이상은까지 모든 연주자들의 선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마녀들의 축제 같은 발푸르기스의 밤이 음악으로 형상화된다면 스트링 옥텟 콘서트의 프로그램이 연주되던 바로 그 순간같지 않을까. 강렬함과 부드러움, 풍성함과 화려함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호흡으로 녹아들었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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