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이 죽으면 사랑도 죽을까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도서]

글 입력 2022.12.0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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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는 황정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2015년 대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몫만큼 애써 살아가고 있다'는 책 소개 글처럼 소라, 나나, 나기의 유기적이고도 개인적인 삶을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다시 읽어보았다. 프로이트의 멜랑꼴리론, 라깡의 부성은유, 트라우마 등의 간접적인 내용이 함께할 것이다.

 

 

 

불완전한 나와 너


 

우리는 누구나 다 불완전하다. 그러나 사회 속 우리는 불완전성을 꼭꼭 숨긴 채 살아간다. 나의 불완전함과 불안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반대로 나에게 안정이란?


그래서 심신이 더 미약하고 나약해질수록 나는 더욱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웃으며 안도한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은 나에게서 비롯되지만, 그 문제 해결을 위해 하루를 살게 해주고 하루를 더 버티게 해주는 건 사람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어서. 그래서 결국 나의 불안정은 타인으로부터 비롯되고, 우습게도 그 불안정을 타인으로부터 치유 받아서 나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여기에도 불완전한 사람들이 나온다. 이름부터 타인에 기인한 불완전을 의미한다. 열매 라(蓏)에서 할아버지의 실수로 미나리 라(蘿)가 된 소라, 엄마 애자의 함량이 지나치게 높은 이름을 받은 나나, 아버지의 실수로 나길에서 리을이 빠져버린 나기. 이들은 이름에서부터 타인으로 긍정적이지 못한 영향으로 시작하지만, 서로가 있어 버틸 힘이 되어주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특히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준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너를 대명사가 아닌 존재 자체로 봐주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내 인생에 너를 들인다는 것. 서로의 이름을 곱씹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은 결국 서로 ‘나비바’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만들게 된다. 우리를 의미하는 새로운 이름. 새로운 증명.


특히 소라와 나나는 가족 간의 서열과도 막론하고 이름을 부른다. 소라와 나나는 엄마를 엄마라고 칭하지 않는다. 애자. 사랑 애(愛) 자체인 애자로 부른다. 나나도 소라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름 그 자체로 부른다. 이는 이들의 가족 관계가 수평적이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위계를 따질 수준의 가족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이유도 있다. 특히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 속내에는 아픔과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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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부재, 트라우마



애자는 소라와 나나를 두고 죽으려 했다. 소라는 나나가 아무리 언니야, 언니야 하고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소라와 나나에게 모든 걸 다 버리고 훌쩍 이사하고, 수레를 어린 딸들에게 돌려주고 오라고 하는 애자는 엄마일 수 없었다. 언니를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뒤처지면 절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이 앞만 보고 걷는 소라는 나나에게 언니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름이 된 것이다. 결국, 정말 그 존재 자체가 된 것이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 결핍이 생겼다. 그리고 이 결핍의 시작은, 아주 첫 시작은 금주 씨의 죽음.


금주는 죽었다. 금주가 죽고 애자도 죽었다. 금주는 사회적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이었다. 허망한 것이 본질인 삶. 소라는 애자에게 이것을 배웠지만, 사실 애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게 맞을까? 애자는 금주가 죽고 그런 것들을 깨달으며 점점 죽어간 모양이다. 죽고 나면 그뿐인 걸,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들로만 세계를 채워야 살아갈 수 있다.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전심전력한 것이 사라지면 살아갈 수가 없기에. 이름에부터 사랑이 있는 애자에게 사랑이 없는 삶이란, 살아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고 텅 빈 껍데기만 남아있던 나방처럼, 그렇게 여러 가닥으로 찢어지는 일이었기에.


애자는 잃어버린 대상에 대해 결국 승화하지 못하고, 소라가 열심히 사랑했던 애자의 나이가 될 때까지 결국 소진하지 못하고 그렇게. 빈자리에 대해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가, 외로움의 감정도 느꼈다가 그렇게 평생 사랑에 빠진 채로 산다. 사람이 죽어도 사랑은 죽지 않아서. 사랑은 사람이 없으면 시작할 수 없지만, 이미 사랑이 시작되면 그 사랑은 이제 나의 것이 되어서 나를 집어삼키기도 하고 내가 거기에 푹 빠지게 될 수도 있고 나를 견디게도 하고 견디지 못하게도 하고, 그런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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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3

 

 

  

전심전력의 사랑이란



그래서 내가 기다리는 것이 결국 너의 죽음인지 삶인지 모르겠다. 나의 무의식에서 너는 죽는다. 너를 볼 수가 없어서 나는 꿈에서라도 너를 보는데 그마저도 너는 죽는다. 네가 죽는 것이 꿈이라 다행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네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렵지만 결국 네가 언젠가 죽는다면 나는 사실 너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기의 사랑은 이보다 더 완벽하게 프로이트의 멜랑꼴리를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잃어버린 너를 동일시하다 못해 나기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기는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주었다. 네가 나를 사랑스럽다고 여겨준다면, 그때는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결국, 내 인생의 처음과 끝 모든 것이, 내 인생의 의미와 내 인생의 본질이 다 너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너에게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가 그날 없어져서 미운데, 이제는 그 날 너를 잃은 내가 밉고. 네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는데, 네가 내 세상에서 다시 볼 날이 없다면 죽음의 소식이라도 들려오길 바라고.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다. 사람이 없어도, 사랑은 한다. 결국 나기와 애자의 사랑은 자신의 세상에서 상대를 잃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존재한다. 물론 애자는 ‘죽음’이라는 조금의 여지도 없는 끝을 마주했지만 나기는 죽음과도 다름없는 끝을 안고 산다.

 

죽음이라고 완전한 마침표가 찍히지 않아서 나기는 그의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죽음이라는 완전한 마침표가 찍혀서 애자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전심전력한 사랑을 보고 자라온 나나는 절대 애자처럼 무엇에 전심전력하지도, 특히 사랑을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결혼 전에 임신하고, 자신을 미행하고 결국 자신의 목을 조르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남자친구를 만난다.


그러나 뜻밖에, 사랑은 나나가 평생을 지켜보며 학을 뗐던 종류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에게 온몸과 온 힘을 다하는 사랑을 안 하겠다고 늘 다짐하며 살아와서 그런 것인지, 그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태몽을 너무 많이 꿔서. 낳겠다고 다짐한 이후의 순간까지도 매번 다채롭고 색다른 태몽을 주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꿈을 보내올 정도로 태어나고 싶은 아이구나, 라는 말은 사실 이렇게 열심히 나를 필요로 하고 간절히 하고 사랑해 주는 존재가 있구나, 와도 같은 말로 들린다.


오히려 가정에서 가장 결핍을 느꼈던 나나는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존재가 생기면서 결핍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되는 것을 애자가 되는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여겼던 소라와 나나는 엄마와 애자를 분리하고, 의미를 재정의하게 된 것이다. 초반에는 소라가 친절하게 구는 것이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던 나나도 마지막에는 자신을 스스로 엄마로 칭하기 시작한다.


이는 나나가 이제 ‘나’에서 ‘엄마’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나라는 이름 덕분에 스스로를 이름 그 자체로 칭하거나 3인칭으로 줄곧 써도 어색하지 않아 자칫 자의식이 과잉되어 보일 수 있었던 나나가 이제 스스로를 3인칭으로 쓰는 칭호는 ‘엄마’가 되었다. 유년 시절의 가족에게서, 특히 엄마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스스로 그 자리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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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의 상처



한국 사회의 아버지에 대한 상처는 다 다르지만 결국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나기가 사랑한 ‘너’의 아버지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다. 한국사회의 ‘아버지’의 단면, 부성은유와 아주 결부되어 있다. 자신의 욕망을 아들에게 채운다. 공부를 잘해야 해, 대학을 잘 가야 해, 너는 나의 명성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해, 그래서 체벌을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바람을 옆에서 거든다. 결국 ‘너’는 엇나갔고 비뚤어졌고, 아버지의 죽음에도 억울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를 그렇게 길게 괴롭혔으면서 자신은 고통 없이 순식간에 죽어버린 사람. 억울해. 억울해.


이런 감정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족 내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느끼는 것은 패륜으로 간주하고, 죄짓는 사람이 되며 특히나 기피한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증오와 분노를 타인에게 느끼기도 오히려 쉽지 않다. 가족, 가족이라서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증오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나의 가족인데, 그래도 나의 핏줄인데, 그래도 내 존재의 근원이고 나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당신들을 닮은 당신의 자식인데.


그래서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때로는 그들을 망가뜨리는 것이라서 망가지기도 한다. 나의 욕망이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동일시되었다면 나의 망가짐 역시 당신의 망가짐이 되기도 한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억압에 시달림받던 내가 동일시라는 기제를 통해 극단적으로 발현될 때 나기의 ‘너’와 같은 양상을 띤다.


가부장적인 부분은 나나의 아이의 아빠인 모세의 가족에서도 드러난다. 모세 아버지는 현대 사회의 신문물,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집에서도 요강을 쓴다. 왜? 어떠한 건강 문제나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 그냥. 그런데 그 요강을 엄마가 치운다. 왜? 그 엄마는 그 요강을 치우는 것이 정말로 자기의 욕구였을까? 그것에 대해 모세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이상해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물어보는 나나에게 오히려 불쾌감을 드러낸다. 가족끼리는, 부부끼리는 그럴 수 있다고. 부부끼리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며 나에게 부부가 되자고 말하는 것은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길 기대하고 말하는 것인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유일하게 궁금해 하는 나나에게 모세의 엄마는 전화가 온다. 1월 7일이 아이에게 좋은 날이니 그 날 수술로 배를 열어 애를 낳자. ‘그렇게 하면 아프잖아요?’ 나나의 말에 ‘어차피 겪을 거잖아요?’ 되려 묻는 모세의 엄마. 어차피 아플 것이니 아빠의 성씨, 그리고 나의 아들의 성씨를 따를 그 아이에게 좋은 것으로 맞추자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해하는 사람은 나나밖에 없다. 이것을 이상해하지도 않고 의문을 가지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는 모세도 사실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은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처. 부성은유로 보자면 아버지의 욕망을 대리하는 엄마의 모습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표가 어머니 욕망의 기표로 대체되며, 엄마는 그 가정 내에서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기표를 무의식적으로 대체하고 있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들의 욕망은 자식 세대에게 모두 상처로 자리 잡게 된다.

 

 

 

사소한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라면


 

사람을 살게 하는 것도 죽게 하는 것도 모두 사랑이다. 네가 아니면 나를 망가뜨릴 수 없고, 네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담배를 피우게 되다가도 너무 많이 피우면 내 냄새가 돼서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사랑이 사람을 결국 죽고 싶게 만들고 다시 살고 싶게 만든다. 너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네가 없어지고 말고 와 상관없이 ‘너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나의 일상이 된 것이다. 그 때 무엇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했는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이제 그냥 너를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일이 된 것.


소라는 때때로 애자를 보지 못하고, 나나는 엄마와 언니를 극복하고자 하고, 나기는 멜랑꼴리에 빠져 있다. 갑작스럽게 부여하는 친척들의 책임, 제사와 경조사를 챙기는 것과 같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모습들, 그리고 폭력적인 나나의 남자친구, 아픈 나기의 사랑까지. 많은 것을 겪었지만 결국 소라와 나나와 나기가 함께한다.


삶을 죽게 하는 사랑도 있지만 이렇게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사랑도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모두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사랑을 통해 살아가는 삶이라면, 이것이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라도, 우리가 덧없는 존재일지라도, 그래도 괜찮은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것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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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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