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보,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 이국에서

은폐와 드러냄의 미학,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글 입력 2022.11.2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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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민주공화국,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한 이 낯선 국가의 정체는, 검색창을 아무리 두들겨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작가가 구상한 가상의 국가였으리라. 픽션 소설은 오랜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책장을 넘겼지만, 이내 너무나 익숙한 이 이야기가 절대 픽션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왠지 들어 본 적 있는 말들, 낯익은 사람들의 모습, 보보민주공화국(이하 '보보')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국가다.


보보는 잦은 내전과 쿠데타가 끊이질 않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이며, 주변국 난민들이 인접한 큰 국가로 들어가기 위해 경유지로 삼는 곳이다. 황선호는 자국에서 그가 따르던 보스가 뇌물 수수 스캔들에 휩싸이자, 사건을 잠재우기 위해서 '외국으로 망명해 버린 책임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될 사람이 자신일 줄 꿈에도 몰랐던 황선호는, 보보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면서 절망한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보보의 쿠데타 정권이 보보에 기거하는 외국인을 모두 추방하는 정책을 펼치자, 낙동강 오리알 신세의 그는 그렇게나 떠나고 싶던 보보에 어떻게든 남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닥친다.


작가는 정교하고 세밀한 서술로 이야기의 템포를 끝까지 흥미롭게 끌어간다. 특히 황선호가 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이의 과거를 알게 되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를 지키려 힘쓰는 스토리는 가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다양한 논의를 잠시 제쳐 두고, 이 글에서는 내부의 순수성과 작가가 지명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다루려 한다.


보보의 수상은 어느 날 선언한다. '보보민주공화국은 외부인들이 우리 국토를 통과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선언이 있던 직후, 해안에 경비병이 배치되어 배를 타고 들어오는 난민의 접근을 막았고, 사실상 받을 확률이 0%에 가까운 국민안전국 허가증이 없다면, 보보에 기거하는 외국인은 추방되어 바다를 떠돌거나 수용소에 감금될 운명에 처했다.


본래 보보는 난민의 경유지였기 때문에 보보 사람들은 외지인의 존재를 낯설게 여기지 않았으며, 실은 무관심에 가까웠다는 말이 더 정확할 정도였다. 그런데 전쟁과 폭력으로 자국을 떠나는 난민들이 점차 증가하고, 그에 따라 이웃의 큰 국가들이 난민 수용을 꺼리게 되면서, 보보는 더이상 경유지가 아닌 정착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 집권한 쿠데타 정부는 모든 사회적 혼란과 결핍을 '외부인'의 탓으로 돌리려던 것이다.


보보의 '안전'에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던 황선호는 그저 '외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장기 투숙하던 호텔에서 내쫓겨야만 했다. 어릴 때부터 사업을 배우기 위해 보보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던 호텔 VIP 엘라핀 역시, 예외는 없었다.


정부는 이 같은 정책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외부인은 위험하니까. 그런데 그 위험성을 규정하는 것은 외부인의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적어도 정부 입장에서는, 그들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그들이 내부의 '순수성'을 해칠 이른바 '이물질'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외부인'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기들과 구별하기 원하는 이들에 의해 규정된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손님이니까, 손님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외부인, 소속이 없는, 바깥에 있는 사람은 존중과 배려의 대상에서 배제해도 되는 사람,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출신과 성향과 목적과 관습, 즉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손님이 아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는 것이 당연한 무언가를 빼앗아 갈 것이고, 내부를 더럽힐 것이고 마침내 혼란에 빠뜨릴 거라는 식으로 근거 없는 불안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311쪽

 

 


내부의 순수성, 그 허구적 몽상



보보의 쿠데타 정권은 '순수한 내부인'만을 보호하고 '외부인'을 방출하려 했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의 명확한 구분선은 실존한다고 볼 수 있는가? 내부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사회에서 성립 가능한 개념인가?


자전거 여행 작가 김경호는 보보의 햇빛을 '투명하고 순수'하다고 표현했다. 그런 햇빛 아래서, 황선호는 마치 벌레가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듯한 끔찍한 두통을 겪었다. 그는 두통에 시달리면서, 햇빛 때문에 사람을 쏘았다는 이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무슨 일인가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 같고, 그 일이 설령 사람을 향해 총을 쏘는 일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았다'면서.


그러면서 황선호는 자신의 두통이 햇빛을 넘본 데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태양빛이 순수라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보보는, 순수라는 절대성에 대한 갈망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광기가 서려 있는 공간이다.  


 

'순수는 오염되지 않지만, 눈은 순수를 본(보려고 한) 대가로 오염된다. 순수를 보는 시선은 덫과 같다. 이 덫에 걸리는 자는 덫을 놓은 자이다. 말하자면 눈멂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탐욕의 시선을 구사한 데 대한 화, 일종의 형벌이다.'

 

103쪽

 



보보의 쿠데타 정권은 '순수한 내부인'을 가려내려 하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같은 단어를 비웃듯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온통 뭉뚱그린다. 김경호는 머나먼 아시아 국가에서 온 '외부인' 여행자지만,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친구들의 집'에 정착하여 그곳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내걸었다. 엘라핀 역시 국적이 다른 '외부인'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보보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겨 왔다. 

 

김경호와 엘라핀은 쿠데타 정권의 기준에 따르면 순수한 내부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외부인'으로 밀려나기에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보보를 사랑하고 그곳을 자기 정체성의 근원지로 여기고 있었다. 이들 외부인의 내부 한가운데에 보보가 있었으므로.


따라서 국적이니 피부색이니 하는 인위적인 구분 선은 내부와 외부를 갈라놓을 수 없다. 명확한 기준의 부재는 '내부의 순수성'이 인간이 소유하거나 창조할 수 없는 대상임을 밝힌다. 그런데도 보보 정권은 제도와 처벌이라는 인위적 기준을 통해 가질 수 없는 내부의 순수성을 취하려 탐욕했다. 


그에 대한 형벌로 이들의 눈은 멀어 버렸고, 눈이 먼 인간은 오직 머릿속 믿음에만 의존한 채 살아간다. 다시, 맹목적 믿음은 이내 광기로 변질하고, 마침내 - 탕! 순수를 탐하려던 이들의 지끈지끈한 광기는 타인에게 총구를 겨눔으로써 분출된다.


그리하여 황선호가 쟝을 만나 '친구들의 집'에 정착한 뒤부터 두통을 호소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친구들의 집'은 동굴 안에 지어져 햇빛이 들지 않았다. 이는 '친구들의 집'이 순수에 대한 욕망과 광기에서 벗어나, 외부와 내부가 혼재된 인류애적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친구들의 집'은 애써 내부의 순수성을 확보하려 들지 않으며, 언제든 들어왔다가 또 언제든 나갈 수 있는 그곳에는 안도 밖도 없다. 다양한 출신 국가의 '친구'들은 비록 서로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함께 살아가며 식량을 나누어 먹고 일을 분담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인종도 국적도 아닌, 외부인의 내부와 내부인의 외부가 공명하여 형성된 '인류애'다. 사랑으로 뭉친 공동체는, 그 어떤 인위적 기준으로 얽힌 공동체보다 더, 힘이 세다. 


 

 

은폐함으로써 드러내기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작가가 지명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독자인 우리는 황선호의 이름만 보고도 그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전제한 채 이야기를 읽는다. 게다가 그의 보스가 시장으로 일했다는 도시는 인구 300만에 육박하는 광역시였다는데, 통계청에서 발표한 인구 통계를 보면 한국에 그런 도시는 많지 않다. 

 

그런데도 작가는 '대한민국'과 같은 명확한 지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 없다. 이 소설을 통틀어서 단 한 번도. 단지 '그 광역시', '아시아 어느 지역', '어떤 도시'라는 지시어와 대명사만이 구체적인 지명을 뭉뚱그릴 뿐이다. 유일하게 드러난 지명은 '보보민주공화국'뿐이지만, 그마저도 허구의 국가일 뿐이다.


이처럼 작가가 사실적인 지명을 은폐하고 가상 국가를 설정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보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당장 한국에도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있다.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기준은 국적뿐만이 아니다. 성 지향성, 성별, 종교 등을 근거로 외부인에게 낙인을 찍고, 그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모습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 앞에 만연히 펼쳐져 있다. 광기는 픽션 공포 영화 속에만 있지 않다.


그런데, 만약 보보라는 가상의 지명이 아닌 내가 이미 잘 아는 특정 국가의 이름이 등장했더라면, 보보에서 벌어진 일을 실제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저, 그 특정 국가에서 벌어진 특별한 사건 정도로만 인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명을 감추자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지명들이 눈앞에 확 드러난 듯 보였다. 어디에도 없지만 동시에 어디든 될 수 있는 곳, 보보. 그러므로 보보의 문제는 내가 사는 세상의 문제이기도 했다.


은폐를 통한 드러냄, 그 우아한 손짓 앞에서, 뜨거운 햇빛 아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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