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로큰롤 키드야 - 1 [공연]

당신에게도 있을 취향의 스위치
글 입력 2022.11.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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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로큰롤 키드야 

당신에게도 있을 취향의 스위치 - 1

 

[예나 지금이나 록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몸을 둥둥 울리는 베이스와 드럼, 그 사이를 뚫고 달리는 기타 소리를 들으면, 정신없이 뛰노느라 진이 빠진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건 어떤 특정한 주파수 같은 거다. 각자 그런 스위치가 있지 않은가. 외부에 있는 특정한 무언가가 발현되면 감전된 듯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 그건 거부할 수 없는 무조건 반사다. 그것이 본인의 취향이 반영된 음악이나 음식일수도 있다. 나에겐 록일 뿐이다.]


‘몇 년 만에 록 페스티벌을 갔다’라는 문장을 두고 몇 번이나 고민했다. 무엇에 대해서 써야 할까. 이 글은 몇 번의 퇴고를 거쳤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남기고 싶지 않아서 ‘록은 어쩌고, 페스티벌은 저쩌고’로 시작했다가, ‘요즘 록은 말이죠’라는 시건방진 문장으로 운을 띄우기도 했다. 록이 다시 유행했으면 좋겠고, 록스타라는 말이 힙합에 쓰이는 게 거슬리고, 그런데 록이란 음악은 본래…등등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았다.


결국 ‘나는 예나 지금이나 록을 좋아하고, 록 페스티벌을 가면 그걸 체감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누가 읽어주겠냐마는, 허공에 잽을 날리는 심정으로 한 문장 씩 적었다. 11년 전, 처음 록 페스티벌을 갔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지금을 체감하는 수밖에. 사소한 취향의 고백이 어쩌면 나를 이루는 조각들을, 말미에 이야기할 ‘스위치’를 찾는 일일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록 페스티벌

낡아가는 몸에 기름칠이 필요할 때



록 페스티벌을 갔다. 마지막으로 갔던 페스티벌이 2017년에 열린 지산 록 페스티벌이었으니까, 약 5년 만이다. 군 복무 기간과 팬데믹으로 허비한 시간이 자그마치 5년이다. 어느새 2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나중에 가면, 그러니까 서른이 넘어버리면 체력이 달려 페스티벌에서 맘껏 뛰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간 운동을 멀리해 녹이 슬어버린 몸뚱아리가 비명을 지르다 보니 숫자에 집착할 수 밖에. 그래, 올해는 꼭 록 페스티벌을 가야겠다. 마감에 시달리고, 절제력 없는 소비 습관 탓에 돈에 쪼들리지만, 그런 거 상관없이 다 제쳐두고 꼭 가야지.

 

오랜만에 가는 페스티벌이니만큼 아티스트, 위치, 얼마나 ‘로큰롤’ 한가(나만의 비루하지만 엄격한 기준에서 락이라 할 수 있는가) 등 모든 것이 중요했다. 여름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자취를 감췄던 페스티벌들이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아뿔싸. 페스티벌을 골라서 갈 상황이 아니었다. 차비만 꼭 쥐어지면 훌쩍 떠나던 때와 달리 시간이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 때가 되어버린 것이다. 같이 페스티벌을 다니던 친구들도 직장이 생기고, 나도 일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교적 시간이 한가할 때, 당장 지금으로부터 가장 멀리 예정된 페스티벌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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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록페스티벌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22살의 나는 앞으로 매해 여름마다 록 페스티벌에서 맥주를 배가 터져라 마시고, 신물이 올라와도 탈진할 때까지 뛰어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그때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나이가 되니,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동경했던 록스타들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도 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있는데, 어째 나는 시간에 굴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그것이 업이고 생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나도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서 이제 막 굴러가기 시작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마음 한쪽에선 ‘사이클에서 순응하는 건 록이 아니잖아!’라고 외치고 있었다.

 

올해도 글렀구나. 심란한 말을 내뱉는 마음을 구석으로 밀어내고, 매거진에 수록할 화보 레퍼런스를 찾았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것’의 다른 이름은 ‘일하는 시간’이다. 지금의 시간에 충실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해시태그를 적어야 기가 막힌 사진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피드를 슥슥 내리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부산 록 페스티벌이 개최된다는 소식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날짜도 여유 있었다. 링크를 복사한 후 친구들을 모아 단톡방을 만들고 공유했다. 우리 여기 가자. 이유 불문. 무조건 가야 한다. 부산 록 페스티벌이니까.

 

 

 

16살의 나는

그렇게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고



부산 록 페스티벌은 11년 전, 록 페스티벌이 정확히 어떤 문화인지도 모르고, 록이 좋으니까, 그냥 록이라서 무작정 떠났던 첫 페스티벌이었다. 오랜만에 가는 록 페스티벌은 특별해야 했고, 내가 아직 ‘록을 좋아해, 한창 청춘이야’라는 걸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부산 록 페스티벌이 적격이었다. 그 오랜 추억을 관통하는, 옛날의 무모함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찾아야 했다.

 

11년 전, 16살의 나는 록에 푹 절어 있었다. 어느 정도로 절어 있었냐면(중2병이 어떻게 왔냐면), 록이 아니면 음악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그마한 MP3에는 80, 90년대를 풍미했던 밴드들의 음악으로 가득했다. 오아시스의 ‘Live Forever’를 들으면서 등교하고 (‘Morning’이란 가사가 첫 소절에 들어가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Scar Tissue’를 들으면서 하교했다(노을지는 풍경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용돈을 모아 기타도 샀다.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동경하던 그들과 같은 대형 밴드가 다시 나타나 온 세상을 뒤흔드리라 꿈꿨다.


그때도 록은 조금씩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던 시기긴 했지만, 소위 록스타라 불리는 이들의 전설적인 페스티벌 공연을 보고, 저런 페스티벌에서 ‘로큰롤’을 외치리라 다짐했다. 록 페스티벌을 가야만 진짜 록을 사랑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거기를 가면 인생의 큰 변화가 생기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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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의 부산 록 페스티벌 라인업 ⓒ부산록페스티벌

 

 

2011년 부산 록 페스티벌은 무료 공연이었다. 돈 없는 16살 록 키드들에게는 최고의 페스티벌이었던 셈이다. 미성년자 4명이서 부산까지 갈 방법과 3일 동안 묵을 숙박? MP3로만 듣던 국내 밴드들의 노래를 공짜로 들을 수 있는데 그건 큰 문제가 안 됐다. 가장 싼 무궁화호를 끊고, 삼락 생태 공원 한쪽에 마련된 캠핑존에 칠 대형 텐트를 챙겼다. 10만 원 정도를 꼬깃꼬깃 주머니에 챙겨 넣고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부산의 7월은 덥고 습했다. 6인용 대형 텐트를 친구들과 낑낑 들고 사상역에서부터 공원까지 걸어가는데 땀이 주룩주룩 났다. ‘아 괜히 왔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황금 같은 여름방학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엉성하게 텐트를 치고, 주저앉아 땀을 닦을 때까지 만해도 그렇게 생각을 했다. 일렉 기타 사운드 체크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무대 앞으로 달려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무대는 하나였고 흙바닥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무대 앞으로 갔다. 록 페스티벌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그냥 록 음악을 듣고 싶었을 뿐이니까. 고고스타의 무대였나, 휘몰아치는 베이스와 드럼에 맞추어 몸을 이리저리 부딪치는 형들이 보였다. 한 손에는 맥주캔이 있었다. ‘미친 사람들이다’ 우리한테도 어깨를 부딪쳐 오길래 흠칫 놀라 몸을 피했다. 관중 한 가운데에서 그 형들이 몸을 흔들어 댈수록, 우리는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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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보금자리였던 텐트. 

싸이월드에 '집'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올렸다. 쿨해보이고 싶었나보다.

 

 

비가 온 날에는 텐트에 콕 박혀 있었다. 혈기 왕성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말 그대로 ‘싸는’ 남자 중학생 5명이 꿉꿉한 날씨에 제대로 씻지 않고 텐트에 박혀 있다고 상상해보아라.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목욕탕을 찾을 엄두도 안 났고, 갈 돈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달리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대신 ‘록’이란 단어가 마약처럼 모든 상황을 납득시켰다. ‘이런 생고생도 록이야!’라는 정신으로 버텼다(그리고 이 정신은 성인이 된 이후, 엉망진창인 록 페스티벌을 갈 때마다 도움이 됐다. 심지어 올해 부산 록 페스티벌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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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에 묵혀있던 사진들 덕분에 이 글을 쓰게 됐다.

 

 

마지막 날, 노브레인과 하드코어 메탈 밴드 피아의 공연을 듣다가 막차(당연히 무궁화호) 시간에 맞추어 3일 동안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텐트를 급히 철수하고 부산역으로 뛰어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서울역에 도착해 멍하니 하늘을 보니 긴 꿈을 꾸다 온 느낌이었다. 3일 동안 내가 희미하게 꿈꾸던 이상향에 잠시 다녀온 것 같았다. ‘내 인생의 큰 변화가 생길 거야’라는 기대처럼 커다란 마음의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에 가서 ‘그때 텐트만 짊어지고 부산에 갔었어’라며 추억을 했지만, 내가 로큰롤 스타가 되는 일도, 록이 다시 세상을 뒤흔드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 사건이 ‘잊고 싶지 않은 한 시절’이 되리라 확신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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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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