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겡끼데스까? 당신의 영화는 안녕하신지요

글 입력 2022.10.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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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추위가 유독 빠르게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이렇게 매해 겨울이 다가올 때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다시 피어오르는 일본 영화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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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 <러브레터 (1995)> 스틸컷

 

 

개봉한 지 약 30년이 되어가지만, 이웃 나라 한국에서 아직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영화. 크리스마스를 <나 홀로 집에> 케빈과 함께 보내는 것이 연례행사라면, 나는 첫눈이 오는 날을 항상 두 명의 이츠키와 보내곤 한다. 한국에서만 무려 7번 재개봉했다는 사실로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이 작품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일본 영화임이 틀림없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는 바로 그런 존재다. 우리가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을 떠올릴 때 그 표준이 되곤 하며, 희대의 명대사 "오겡끼데스까?"는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어 대사이지 싶다. 요즘 날씨가 추워지며 <러브레터>를 떠올렸을 때, 동시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개봉한 일본 영화를 본 건 과연 몇 번이나 되려나?’

 

 

 

일본 영화 산업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현재 일본 영화 산업은 과거의 영광이 무색하리만치 깊숙이 망가졌다. 일본 영화계는 우리나라가 전쟁의 후유증으로 하루하루 생활고에 시달리던 1950년대에 황금기를 맞이했다.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났고, 정부의 영화 제작 통제와 검열이 철폐되어 많은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 작품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일본 감독의 영화들이 베니스, 칸, 베를린 등 각 영화제를 번갈아가며 마치 '도장 깨기'하듯 수상을 이뤄냈다. 이후 일본 영화 산업은 TV의 보급으로 극장 관객이 줄어들며 쇠퇴기를 겪은 뒤, 8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9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부흥에 성공한다.

 

그때 등장한 신진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기타노 타케시 등 사실상 지금의 일본 영화계를 지탱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러브레터> 역시 1995년에 개봉한 작품이다. 놀라운 건, 일본 영화가 전성기를 지나 90년대에 중흥기를 맞을 때까지 우리나라는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일절 허용하지 않던 시기였다. 따라서 <러브레터>는 개봉 당시 국내 극장에 들어오지 못했고, 4년이 지나서야 한국에서 공식 개봉할 수 있었다. <러브레터>가 정식 수입되지 않아 수십만 장의 불법 복제 DVD를 양산해 돌려보던 시절, 그때의 한국 영화계는 일본의 뒤를 좇아야 하는 입장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일본 영화 산업은 사실상 몰락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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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과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드라이브 마이 카>

 

 

물론 <기생충>과 <미나리>가 연속으로 아카데미를 휩쓸고 <오징어게임>에 세상이 열광하는 동안 일본도 가만히 있던 것만은 아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수상은 하지 못헀으나 일본 영화 최초로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일본 영화계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외에도 세계에서 인정받을만한 젊고 유능한 감독을 배출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허나 이는 냉정하게 망가진 시스템을 뚫고 등장한 소수 엘리트의 선전에 불과하다. 일본 영화계는 구조적으로 아주 크나큰 문제를 떠안고 있다.




총체적 난국에 봉착한 일본 영화계


 

시네마투데이 재팬에서 발표한 지난 2021년 일본 영화 흥행 순위를 보면 현 일본 영화 산업의 실태를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1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2위 <명탐정 코난: 비색의 탄환>, 3위 <용과 주근깨 공주>로 상위권을 모두 애니메이션이 차지하고 있다. 그 아래 순위도 만화 혹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실사화 영화가 대부분이다. 애니메이션의 본고장답게 작품성이 훌륭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비중이 정말 극단적으로 크다. 자국민들은 대부분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성향이기에 선호도가 떨어지는 실사 영화에는 투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자리를 잃은 배우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성우로 전업하기도 하는 실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혹은 실사화 영화를 '적당히'만 만들면, 기존 원작 팬층의 수요와 함께 평균적으로 최소 손익분기점은 넘기게 된다. 자연스럽게 다시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기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점점 줄어들어 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존재하는 원작 만화에 기대다 보니, 독창성을 겸비한 새로운 각본이 흔히 등장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킹덤>이나 <종이의 집>이 글로벌 차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일본이 만든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가 화제라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자체가 일본 정부의 프로파간다로 악용되고 있는 점도 큰 문제다. 실제로 일본은 <명탐정 코난>처럼 국민적 인기를 자랑하는 작품의 극장판을 거침없이 정치 선전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제로의 집행인>은 공안을 소재로, <절해의 탐정>은 일본 자위대를 소재로 했으며 심지어 욱일기까지 등장해 국내에는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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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익 100억 엔 돌파, 역대 일본 TVA 극장판 흥행 3위를 기록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그리고 일본 영화 산업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불합리한 수익 배분과 제작 구조다. 일본의 ‘제작위원회’는 영화 기획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도맡는데, 동시에 투자자의 역할도 겸한다. 이때 이들의 입김이 매우 강해 감독의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게다가 영화가 흥행하더라도 극장과 제작위원회가 대부분의 수익을 나눠 가지는 구조로, 감독이 얻는 수입은 거의 없다. 현 일본 최고의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마저 인터뷰에서 "1%의 성공 보수를 받기 위해 협상한다"고 밝힐 정도다. 창작자의 창작 욕구를 무참히 짓밟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를 버티다 못해 아예 영화계를 떠나는 인물도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맨 인 블랙>,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다키스트 아워>의 분장을 맡은 가츠 히로는 지난 2019년, 아예 미국으로 귀화해버렸다. 그는 2020년 <밤쉘>로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한 뒤 인터뷰에서 “난 일본의 복종적인 문화에 지쳤고, 꿈을 이루는 것이 힘들어 일본을 떠나 미국인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누가 일본에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겠는가.


이렇듯 일본 영화계의 유명 인사들이 자국 영화 산업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일본 영화계가 폐쇄적으로 가고 있다.”, “일본은 국내 시장만으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어 해외 진출에 대한 의욕이 없다.”고 일갈하며 일본 영화계의 ‘갈라파고스화’를 명확히 지적했다. 그는 2018년 <어느 가족>으로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일본 총리 아베 신조가 이에 침묵으로 일관한 사건이 그러한 일본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아베 총리는 일명 ‘쿨 재팬’슬로건을 내걸고 여러 문화 산업에 투자해왔으며 특히 영화 분야에서는 영화광으로 불릴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더불어 일본계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할 정도로 일본과 관련된 명예로운 일이라면 꼬박꼬박 축하 메시지를 보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년 만의 일본 감독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쾌거에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어느 가족>이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했기 때문일까? 감독이 평소 아베 정권과 일본의 우경화를 꾸준히 비판해왔기 때문일까? 거세지는 여론에 일본 정부는 뒤늦게 축하를 표명했으나 고레에다 감독은 공권력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며 이를 ‘쿨’하게 거절했다. <기생충>이 우리 사회를 풍자하며 그 어두운 면까지 가감 없이 드러냈던 걸 떠올려 보면, 일본 정부가 영화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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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밤쉘>로 분장상을 수상한 일본계 미국인 카즈 히로

 

 

 

일본 영화계의 현실을 보며 우리가 얻어가야 할 것


 

일본 영화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한국 역시 지금의 성공에 안주해선 그 전철을 그대로 밟을 수 있다. 일본 영화계의 구조적 문제점은 한국에서도 일부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부터 신진 감독, 독립 영화의 부진은 양국 모두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이다. 투자자와 배급사의 간섭으로 소위 '잘 팔릴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경향도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전환기를 맞음과 동시에 영광의 시대를 보내고 있는 우리나라 영화계가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일본의 영화계 또한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애니메이션과 실사화 영화로 도배된 극장 순위에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처럼 흙구덩이 속 보석 같은 로맨스 영화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도이 노부히로 감독이 연출을 맡고,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드는 거장 사카모토 유지가 각본을 썼다고 한다. 일본 영화 산업이 정말로 쇄신하기 위해선, 이처럼 구조에 저항하는 이들이 말라 죽지 않도록 더 관심을 가져줘야 하지 않을까? 고레에다 감독도 어느덧 환갑이고, 최근작 <브로커>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젊은 신진 감독의 신선한 작품들이 앞으로 꾸준히 나와주어야만 할 것이다.

 

 

[최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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