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일단 비행기표를 끊었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10.2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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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다녀올 생각은 없었다. 그저 2027년에 유럽 전반에 걸쳐 진행되는 거대한 규모의 예술 축제를 즐기고 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조금 일찍 다녀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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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시 기획 프로젝트를 하며 처음으로 만난 친구가 내게 두 번의 제안을 했다. 올여름 같이 떠나보지 않겠느냐고.

 

내가 여름에 해야 할 것들과 그다음에 해야 할 것들이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여행을 떠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다녀온다고 해도 내년 여름, 졸업 이후나 가능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던 차였다. 그렇게 가볍게 넘겼던 질문이, 세 번째 제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쩐지 묵직했다.

 

언니, 진짜 갈래?

 

이번에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나랑 가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던 친구의 말이 어쩐지 공감이 갔다.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 더 많은 것을 배우러 떠나는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랑 가더라도, 관심사가 다르면 한정된 여행 일정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해야 할 부분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랑 가면, 온전히 예술만 즐기고 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5년에 한 번 열리는 카셀 도큐멘타. 유럽의 여러 예술 축제 중 두 행사의 겹치는 주기가 10년으로 가장 길다. 그런데 작년에 열렸어야 할 베니스 비엔날레가 취소되고, 올해로 연기되어 운이 좋게도 10년도 채 되지 않아 두 행사가 겹치게 된 것이다.

 

이 행사 두 개가 다시 겹치려면 2027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눈앞에 기회가 왔는데, 몇 년을 더 기다리자고? 4년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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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놓치기 싫은 것들이 많아질 것이다.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이 생길 것이고,

그것들을 놓친다고 해도 타격이 꽤 클 것이다.

 

2027년의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다녀와야 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다.

 

집에 가던 길 그 연락을 받고, 은행 앱을 열어 잔액을 확인했다. 앞으로 내게 들어올 돈을 계산하고 항공권을 검색했다. 앞으로 약 4개월 간의 일정을 확인하여, 마침내 결정했다. 9월 초에 떠나기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족에게 통보 같은 허락을 구하고, 다녀오라는 가족의 말에 그 자리에서 항공권까지 결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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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에 떠나는 것은 내 일정 상 작지 않은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무리하여 내 생활 중 일부를 떼 가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던 일정이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일단 항공권부터 결제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이상 맞춰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9월 초의 여행은 정말 완벽한 선택이었다. 내가 다녀온 유럽 중 최고의 날씨를 선사해주었고,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전시를 볼 수 있는 시간에는 남는 시간 없이 알차게 전시를 관람했고, 모든 전시가 마감된 이후에는 아무런 계획 없이 텅 빈 시간을 유영했다. 그토록 여유로울 수 없었다.

 

어쩌면 대책 없는 결정이었을 수도 있고, 철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에 남겨진 것들에 대한 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경험은 오로지 그때 뿐이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더 많은 것을 채우고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끊은 비행기 표로 인해, 나의 세계는 더 재밌어졌고 일상은 예술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장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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