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모든 식탁 [사람]

빈부에 대한 논의
글 입력 2022.09.2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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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식탁에 꽃과 촛불과 와인이 있는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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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에 방영된 “시크릿 가든” 드라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빈부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어쩌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물어봤던 질문에 엄마가 대답했을 때부터인 것 같다. 어릴 때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한 걸 보고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엄마, 내가 저 드라마 속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저런 선택을 했을까?” 그때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지금의 너라면 다른 선택을 하겠지. 근데 네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때는 모르겠네.”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적잖이 충격받았다. ‘내 성격이 내 성격이 아니라고?’ 딱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나는 돈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고, 선한 사람은 원래 선하고 악한 사람은 원래 악한 줄 알았다.

 

상황이 성격을 만들고 사람을 만든다는 건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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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엄마의 말 덕분에 돈에 의해 사람의 성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사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돈 때문에 비참해지거나 하고 싶은 걸 포기하는 일을 겪어본 적이 없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친구를 만나 사귀었고,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 자격증 시험료를 내야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내가 살던 동네를 떠나 자사고를 가게 되면서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나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너는 우리가 만만해?”라고 말하고, 입맛이 없어 점심을 먹지 못하는 친구에게 매점에서 1,500원짜리 초코우유를 사다 줬을 때 “아, 역시 돈이 많으니까.”와 같은 말을 들었다.


처음으로 빈부를 내가 직접 겪어본 경우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잘사는 애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고, 그래서 행동과 말을 더 조심했다. 그냥 입맛이 없는 친구한테 사준 초코우유 하나에도 “쟤는 돈이 많으니까.”와 같은 말을 들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과 말이 혹시 내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닐지 항상 검열해야 했다.


물론 그 친구들이 못됐다. 그냥 그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 괴롭힐 만만한 상대를 찾았고, 그게 내가 되었을 뿐임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 3년간 빈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고 그러면서 세상이 참 차갑고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예술을 공부하고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대학원을 갈 거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는 교수가 될 거다. 나는 그림과 음악을 좋아하는데 이유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림과 음악에 위로받는 것처럼 가난한 환경의 사람들도 그럴까.” 광부 화가라고 불리는 황재형 화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고된 삶을 사는 광부와 민중을 조명하는 전시를 개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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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관람하며 내내 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그림에서 작가가 위로를 건네고자 하는 상대방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닐 텐데, 진짜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못 받는 위로 아닌가.’


나는 현재 학교 공부에 만족하고 좀 더 공부해서 좋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근데 요즘 그런 욕심에 회의감이 든다. 공부하면 할수록 미술이 계급의 역사처럼 느껴진다. 미술관, 박물관이 대중에게 열린 것도 미술관과 박물관의 역사를 보면 1793년 루브르 박물관이 대중에게 개방하기로 했을 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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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술은 관객도 전문가와 대중으로 이분시키는 동시에 미술조차도 그렇게 구분한다. 순수예술은 흔히 말하는 고급예술의 영역이고 그 외의 퍼포먼스, 팝아트와 같은 것은 저급예술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이뿐만 아니라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구분된다. 현재는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의 역사를 보면 뮤지엄의 자원봉사자들은 비전문가로 무시되고 그들을 위한 교육도 이뤄지지 않았다.


미술을 인간이 배우는 이유를 교수님이 질문하면 이런 대답이 나온다.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혹은 “더 깊은 사고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식을 배울 수 있어서.” 그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럼, 여유가 없는 사람은 위로도 못 받고 깊은 사고도 못하고 지식도 못 배운다는 거야 뭐야.’


그래서 점점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무엇을 위해 배우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예술을 배우는 건지, 내가 예술을 배워서 상대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아닌 배부르고 여유 넘치는 사람들인지. 이런 생각을 하면 늘 결론은 “세상은 참 차갑고 불공평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픈 곳이다.”라고 난다.


나도 엄마의 대답과 고등학교 때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빈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내 주위는 모두 나와 같은 경제적 수준의 친구이고 오히려 나보다 잘사는 애들이 더 많으니까. 그러나 이미 나는 엄마의 대답을 들었고 고등학교 때 내 모든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내가 배우는 예술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일까. 가진 자가 아닌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하는 예술, 세상은 정말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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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정말 모든 세상의 식탁에 꽃과 촛불과 와인이 놓일 수는 없는 걸까. 그렇다면, 놓이지 않는 사람은 놓이는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없을까.

 

내가 느끼기에 여전히 세상은 차갑고 아픈 것 같다.

 

 

[이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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