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언제나 그렇듯 낭만을 낭비하고 [문화 전반]

물결 랑에 흩어질 만
글 입력 2022.09.2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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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맥주를 들고 세운상가를 걷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가 꽃 피던 중 닫아버린 가게에 아쉬워하다가 제안한 2차 장소였다. K는 서울을 잘 몰라 장소의 선택지는 나한테만 있는 상황이었다. 지도를 보면서 생각해 봐도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았다.


갈 수 있는 곳이 너무 없다.

서울이 이렇게 넓은데.

그러게 서울이 이렇게 넓은데.


이리저리 불 꺼진 인쇄골목을 찾으며 흔들리는 K의 땋은 머리를 보다가 나는 세운상가를 떠올렸다.


세운상가 어때?

거기 뭐가 있는데?

뭐 없어. 그냥 앉을 수 있는 몇몇 의자랑...서울 야경... 그런 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설명을 기다리던 K가 마지막 단어에 고개를 든다. 그럼 가야지. 야경이 있으면 가야지.


세운상가를 걸으면서는 내가 줬던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K랑은 거의 1년 만에 보는 거였다.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 직접 찍은 필름 사진으로 만든 엽서를 포장했다. 역 안에 있던 꽃집의 꽃이 예쁘길래 소국을 한 다발 샀다. 꽃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 K는 입을 틀어막고 달려왔다. 꽃이 찌그러져라 안아주고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낭만걸’이라는 이상한 수식어를 붙였다. 한자와 영어가 섞인 이상한 단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가 위 계단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오래된 간판을 개조한 의자 위에서 맥주를 나눠마시면서 우리는 낭만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는 낭만이 있어. 낭만실조의 세상에 너는 마지막 낭만걸이야. 확신에 찬 K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낭만이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양, 손에 잡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낭만이 뭔데?

그냥 있잖아, 지금 같은 거.


집에 바로 갈 수 있지만 좀 더 걸어 야경을 좀 더 즐기는 것. 가는 길이 바쁘지만 들꽃 하나가 너무 예뻐서 기어코 카메라에 담고 마는 것. 아무 대책 없이 발걸음 닿는 대로 간 마을과 사랑에 빠지는 것. 서로가 생각하는 낭만이 나 한 번, K 한 번 겨루듯 오갔다. 어느덧 리스트가 되어버린 그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K의 말대로 나는 낭만걸이 맞다.


당신이 좇는 낭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실 똑 부러지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일상에 작은 빛이 들어오는 순간들이 아닐까요. 방금까지는 너무나도 미웠던 세상을 한 아름 안아버리고 싶은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고된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눈부신 노을처럼.


낭만주의는 18~19세기에 등장한 하나의 문예사조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심리와 분위기의 예술들. 하나같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허황된 이야기라는 다소 비판적인 시선을 피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등장한 배경을 보면, 왜 이러한 뜬구름 잡는 듯한 낭만주의가 유행했는지 이해도 간다.


산업혁명과 각종 계몽주의로 인한 과도기였다. 아프고 어려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로는 할 수 있지. 그렇게 등장한 것이 낭만주의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그들의 심리, 개성을 그대로 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창구로 낭만주의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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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낭만은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다. 그냥 ‘아 이런 세상이라면 좀 더 살아보고 싶다’, ‘지금 너무 행복해서 죽어도 좋을 것 같다’의 순간의 합계 정도일까. 세상의 구석구석을 좀 더 다정히 보고 싶은 마음과 일상을 소화해 내야 하는 현실이 부딪힐 때면 그 갈등을 겪어내야 하는 나를 위해 적절한 낭만을 적용한다.

 

이를테면 무작정 차를 몰고 좋아하는 드라마 촬영지에 가서 앉아있거나, 시 한 권을 들고 한강에 나가 팔이 따가울 정도의 햇빛을 받으며 몇 km든 걷기도 하고, 서울숲에 가서 네잎클로버를 찾을 때도 있다.


물결 랑(浪)에 흩어질 만(浪). 낭만의 낭과 낭비의 낭은 같은 자를 쓴다. 낭비를 해서 좋은 것은 없다지만 낭만만큼은 가능하다면 계속 낭비하고 싶다. 빚이 없이 사는 것이 꿈이지만, 낭만이나 열정 같은 것들은 빚은 내서라도 쓰고 싶다.


부질없고 덧없는 감정과 순간들을 무용하다 깎아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예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어차피 지나가는 시간인데 그렇게 박하게 굴 건 없잖아.’ 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과는 여름밤 새벽을 걷고 싶다. 끝없이 걷게 되는 요상한 여름의 밤을. 낭만으로 벽을 세운 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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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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