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알렉산더 말로페예프가 열어준 클래식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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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의 나이에 차이코프스키 영 아티스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가 국내 첫 리사이틀을 가진다. (…) 이번 공연은 고전주의 대표 작곡가 베토벤의 템페스트로 포문을 연다. 다음곡으로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과 동시대에 살았던 러시아의 중요 작곡가이자 러시아 전통 낭만음악을 고수한 니콜라이 메트너의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를 연주한다.
- 공연 소개글 중
공연 소개글을 읽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정도의 피아니스트의 공연은 어떠할지 궁금하여 관람을 하게 되었다. 클래식 공연에 조예가 깊거나 음악에 매우 예민한 귀를 가지거나 하지 않아서 피아노 독주회 관람이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조금은 긴장했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말로페예프가 연주했던 각 곡에서 느꼈던 인상을 중심으로 이번 공연의 리뷰를 작성해보고자 한다.
1.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L.v.Beethoven - Piano Sonata No.17 Op.31 No.2 'The Tempest')
말로페예프의 첫 번째 곡을 들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건반을 이렇게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분명 피아노는 건반을 하나하나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마치 활을 그어 소리가 나는 바이올린처럼 소리들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다.
나에게 피아노 건반은 힘이 들어가는 묵직하고 개별적인 점과 같았다. 내게는 아무리 부드러워도 똥똥똥똥 끊어지던 소리였다면, 말로페예프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치는 것처럼 휘리릭 부드럽게 이어지는 선처럼 느껴졌다.
피아니스트의 등을 볼 수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춤추는 사람처럼 음악에 따라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등이 인상 깊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소리와 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소리로 일관되게 부드럽게 채워져 있던 소리와 그에 맞게 움직이던 연주자의 등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템페스트는 흐리고 알 수 없는 풍경을 음악으로 만든 것 같은 곡이었다. 장엄한 풍경을 보면 작가는 언어로 그 인상을 쏟아내듯이 음악가는 그에게 가장 편한 표현방식인 음악을 이용해 이렇게 표현해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익숙했던 악장은 반가웠고,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 곡을 감상하려 한 나의 노력은 재미있었다. 노래 자체에 집중했다가, 떠오르는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감각을 최대한 열어 감상해 보았다. 말로페예프의 템페스트를 보며 떠올린 장면은 아래와 같다.
<폭풍우 같은 비, 보글보글한 거품을 내는 인어. 되게 예쁜 인어. 길게 길게 퍼지는 선. 무용수. 무용수의 손끝에서 뻗어나온 선이 면으로 채워지는 장면.>
2. 메트너 -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 작품번호 22
(N.Medtner - Piano Sonata in G minor, Op. 22)
러시아 비극 작품, 혹은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호러 스릴러 추격전 영화 같은 곡이었다.
가족 간의 사랑과 증오, 고뇌, 서로 죽이고 미쳐버리는 등의 내용의, 복잡하고 화려한 서사의 러시아 작품을 보는 듯했다. 긴장과 이완의 반복에 나의 심장박동수와 숨도 함께 오르락내리락했던 기억이 난다.
메트너의 노래를 들으면서 떠올린 장면을 적어보았다.
<피가 낭자한 성대한 웨딩. 보석에 반짝거리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러시아 황녀가 있는 장면. 피를 곁들인. / 중후반부는 신부가 죽은 뒤 쓸쓸하게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남자가 펑펑 목놓아 우는 장면. / 복수의 추격전, 칼싸움.>
조용하다가 깜짝 놀래키곤 하는 연주였는데, 그 긴장감이 촘촘히 고조되었다가 팡 터지는 순간이 잘 짜여있었다. 그래서 곡이 마구 휘몰아칠 때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모으고 집중하고 있었다. 다음에 놀래키는 장면이 나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게 되는 공포영화처럼, 알면서도 놀라게 되는 긴장감 넘치는 연주였다.
메트너의 곡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는데 러시아 문학작품으로 느꼈던, 러시아스러운 느낌이 진하게 들었던 곡이기에 흥미로웠다.
곡 후반부에서는 피아니스트에게 집중하여 감상했다. 연주자를 보며 지브리에 나오는 가마 할아범(거미인간)이 생각났다. 등을 잔뜩 굽히고는 피아노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열중한 마르고 까만 거미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천장의 콘서트홀에서 마치 자신만의 작은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연주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3. 스크리아빈 - 다섯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16
(A.Scriabin - 5 Preludes, Op.16)
부드러운 트릴이 인상적인 곡이었다. 소파에 누워있거나 거품 목욕할 때 틀어놓고 싶은 노래였다.
연주를 들으며 '음악 감상실에서 혼자 좋은 스피커로 듣는 것과 공연장에서 연주자가 직접 연주하는 것을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인터미션 전의 곡들에서는 당연히 후자를 골랐었는데, 이번 곡은 전자에 마음이 기울었었다.
스크리아빈의 곡은 아주 잔잔하고 조용한 곡이었다. 그렇기에 관객들의 잔기침, 움직임, 작은 소리들이 더 크게 느껴졌다. 말로페예프의 조심스러운 연주에 나의 감각도 한껏 까탈스럽고 예민하게 증폭되어 있었는지 작은 소음도 크게 들리는 듯했다. 그렇기에 스크리아빈의 곡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감상하고 싶은 곡이었다.
곡에서 느꼈던 인상은 아래와 같다.
<나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있다. 나를 사랑하는 잘생긴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치고 있고, 그런 그를 나는 소파에 누워서 편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순간이 참 좋다.>
이어 말로페예프는 스크리아빈의 두 개의 즉흥곡, 작품번호 12 (A.Scriabin - 2 Impromptus, Op.12)와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 작품번호 33 (S.Rachmaninoff - Etudes-Tableaux Op.33)을 연주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는 관객들에게 화답하듯이 총 6개의 앵콜곡을 연주해주었는데, 그 중 첫 번째 앵콜곡에 대한 감상을 남겨두려 한다. 아래는 앵콜곡의 목록이다.
1. Tchaikovsky/Pletnev - The nutcracker suite No.7
2. Balakirev- Islamey
3. Medtner- Sonata Reminiscenza, Op.38 No.1
4. Prokofiev-Toccata, Op.11
5. Medtner -Elf tale, Op. 48 No.2
6. Tchaikovsky/Pletnev - The nutcracker suite No. 5
4. 차이코프스키/플레트뇨프 - 호두까기 인형 7번 파드되
(Tchaikovsky/Pletnev - The nutcracker suite No.7)
정말 좋았던 곡이라 앵콜이 끝나고 제목이 정말 궁금했었다. 본 프로그램 속 곡들은 어려운 국가적 상황 속의 말로페예프의 감정이 드러나는 강렬한 연주들이었다면, 이 앵콜의 첫 번째 곡은 오랜만의 공연에 행복감과 환희를 느끼는 그의 감정이 담겨있는 듯했다. 굉장히 행복하고 즐거운 곡이라 느껴졌다.
말로페예프라는 연주자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고 그렇기에 그에 대해 잘 모르지만, 글로 느꼈던 그에 대한 인상을 닮은 곡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한 시작. 연주자의 사랑스러운 느낌과 재기발랄한 느낌. 그리고 그의 천재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화려하고 웅장하고 무거운 부분까지 담겨있는 곡. 곳곳에 재간둥이처럼 장난스러운 부분도 있음. 청년과 천재 신동의 모습이 모두 담겨있는 곡이라는 인상.>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린 트릴이 부드러운 두 번째 앵콜곡. 좀 더 비장하고 화려한 느낌의 세 번째 곡. 얌전한 곡과 익숙하고 경쾌하고 짧은 곡까지. 계속되는 앵콜에 기쁘고 놀라는 관객들의 기분 좋은 비명과 브라보 소리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생애 첫 피아노 독주회 관람을 말로페예프 덕분에 부드럽고, 화려하고, 비장하고, 행복하고, 유쾌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클래식 공연과 말로페예프의 공연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이진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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